과학 기술의 발달
<서양 문물의 수용>
조선 후기에는 전통적 과학 기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동시에 중국을 통하여 전래된 서양의 과학 기술을 수용하여 과학 기술 분야에서도 큰 진전이 있었다.
서양의 문물은 17세기경부터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에 의해 국내에 소개되었다. 선조 때 이광정은 세계지도를 전하였고, 인조 때 정두원은 화포, 천리경, 자명종 등을 들여왔다.
당시 명과 청의 수도였던 베이징에는 서양 선교사가 있었는데, 조선의 사신은 이 곳에서 서양 선교사들과 접촉하여 서양 문물을 소개받았다. 서양 문물의 수용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주로 이익과 그의 제자들 및 북학파 실학자들이었다. 이익의 제자들 중 일부는 서양의 종교였던 천주교까지 수용한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서양의 과학 기술만을 받아들일 뿐 천주교는 배척하였다.
17세기에는 벨테브레이와 하멜 일행이 우리 나라에 표류하였다. 벨테브레이는 제주도에 표류하여 귀화한 외국인으로, 조선 여성과 혼인하여 1남 1년를 두고 박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는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서양식 대포 제조법과 조종법을 전수하였으며, 하멜 일행은 네덜란드로 돌아가 하멜 표류기를 저술하여 조선의 사정을 서양에 전하였다.
<천문학과 지도 제작 기술의 발달>
조선 후기에는 백성의 생활 개선을 중요하게 여겨 과학과 기술 분야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이 많았다.
서양 과학의 영향을 받아 천문학이 크게 발달하였다. 이익은 서양 천문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으며, 김석문은 지전설을 처음으로 주장하여 우주관을 크게 전환하였다. 홍대용은 과학 연구에 힘썼는데, 김석문과 함께 지전설을 주장하였다. 이 지전설은 성리학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근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또, 홍대용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무한 우주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는데, 당시에는 굉장히 대담한 주장이었다. 이렇게 조선 후기의 천문학은 전통적인 우주관에서 벗어나 근대적 우주관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역법 분야에서는 김육 등의 노력으로 시헌력이 도입되었다. 시헌력은 청에서 사용되고 있었는데 서양 선교사인 아담 샬이 중심이 되어 만든 것으로, 종전의 역법보다 한 걸음 더 발전한 것이었다. 조선에서는 약 60여 년 간의 노력 끝에 시헌력을 사용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서양 선교사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와 같은 세계 지도가 중국을 통해 국내에 전해졌다. 이를 통해 지리학에서도 보다 과학적이고 정밀한 지식을 갖게 되었고, 지도 제작 분야에서도 더욱 정확한 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 이러한 발전은 당시 조선인의 세계관 확장에 도움이 되었다.
● 홍대용의 지전설
천체가 운행하는 것이나 지구가 자전하는 것은 그 세가 동일하니, 분리해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다만, 9만 리의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 이처럼 빠르며, 저 별들과 지구와의 거리는 겨우 반경밖에 되지 않는데도 몇천만억의 별들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하물며 천체들이 서로 의존하고 상호 작용하면서 이루고 있는 우주 공간의 세계 밖에도 또 다른 별들이 있다. ······ 칠정이 수레바퀴처럼 자전함과 동시에, 맷돌을 돌리는 나귀처럼 둘러싸고 있다. 지구에서 가까이 보이는 것을 사람들은 해와 달이라 하고, 지구에서 멀어 작게 보이는 것을 사람들은 오성이라 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동일하다.
<담헌집>
<의학, 농학의 발달과 기술 개발>
조선 후기에는 의학 역시 크게 발전하였다. 17세기 초에 허준은 동의보감을 저술하여 의학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동의보감은 우리의 전통 한의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간행되어 뛰어난 의학서로 인정받았다.
허준과 같은 시기에 허임은 침구경험방을 저술하여 침구술을 집대성하였다. 정약용은 마진(홍역)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고, 이 분야의 의서를 종합하여 마과회통을 저술하였으며, 박제가와 함께 종두법을 연구하고 실험하기도 하였다.
19세기에는 이제마가 동의수세보원을 저술하여 사상 의학을 확립하였다. 이는 사람의 체질을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으로 구분하여 치료하는 체질 의학 이론으로, 현재까지도 한의학계에서 통용되고 있다.
17세기에는 많은 농서가 편찬되었으며 농업 기술도 크게 발달하였다. 17세기 중엽, 신속은 농가집성을 편찬하여 벼농사 중심의 농법을 소개하였고, 이앙법의 보급에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상업적인 농업이 발달하고 농업의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곡물 재배법뿐만 아니라 채소, 과수, 원예, 양잠, 축산 등의 농업 기술을 소개하는 농서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박세당은 색경을, 홍만선은 산림경제를, 서호수는 해동농서를 저술하여 농업 기술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19세기에는 서유구의 임원경제지가 편찬되었는데, 이는 농업과 농촌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종합한 농촌 생활 백과사전이었다.
과학과 기술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확신하고 기술 개발에 앞장섰던 사람은 바로 정약용이었다. 그는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뛰어난 것은 기술 때문이라고 여겼고, 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정약용은 스스로 많은 기계를 제작하고 설계하였다. 서양 선교사가 중국에서 저술한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거중기를 제작하였는데, 이 거중기는 수원 화성을 건축할 때 사용되어 공사 기간을 크게 단축하고 공사비를 절감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정약용은 정조의 수원 행차 때, 한강을 안전하게 건너기 위해 배다리를 설계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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