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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근대 태동기의 문화 - 성리학의 변화, 실학의 발달(1)

by 밍밍S2 2023.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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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의 변화


<성리학의 절대화 경향>


  인조반정 이후 정권을 잡은 서인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당시 조선 사회가 가지고 있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명분론을 강화하고 성리학을 절대화하였다.


  반면에, 17세기 후반에는 성리학을 상대화하고 6경과 제자백가 등에서 모순 해결의 사상적 기반을 찾으려는 경향이 윤휴와 박세당 등에 의해 대두되었다. 이들은 주자의 학문 체계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기에 당시 서인(노론)의 공격을 받아 유교에서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인 사문난적으로 몰리기도 하였다.


  성리학에 대한 학자들의 이해도가 깊어지면서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철학 논쟁이 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16세기 후반에는 이황 학파와 이이 학파 사이에서 이기론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이어, 18세기에는 이이 학파를 계승한 노론들 사이에서 인간과 사물의 본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호락논쟁이 일어났다. 충청도 노론은 호론으로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다르다고 주장했으며, 서울, 경기 노론인 낙론은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같다고 주장했다.


  한편, 소론은 절충적인 성격을 지닌 성혼의 사상을 계승하여 양명학과 노장 사상 등을 수용해 성리학 이해에 탄력성을 보여주었다.

 

<양명학의 수용>


  양명학은 중종 때 조선에 전래하여 성리학의 절대화와 형식화를 비판하며 실천성을 강조하였다. 학자들 사이에서 관심을 끌던 양명학은 이황이 정통 주자학 사상과 어긋난다고 비판한 이후로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18세기 초, 정제두는 몇몇 소론 학자가 명맥을 이어가던 양명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으며 하나의 학파로 발전시켰다. 그는 일반민을 도덕 실천의 주체로 인정하였으며, 양반 신분제 폐지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제자들이 정권에서 소외된 소론이었기에, 그의 학문은 집안 후손과 인척을 중심으로 계승되었다.


  강화 학파는 양명학을 바탕으로 역사학, 국어학, 서화, 문학 등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나갔으며, 실학자들과도 영향을 주고받았다.


실학의 발달


<실학의 등장>


  조선 후기의 학문과 사상에서 대두된 새로운 경향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실학의 발달이었다. 실학은 17~18세기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른 사회 문제의 해결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학문과 사회 개혁론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의 운동은 이수광, 한백겸 등에 의하여 처음 제기되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을 저술하여 문화 인식 폭을 확대하였고, 한백겸은 동국지리지를 편찬하여 우리 나라 역시 지리의 치밀한 고증을 꾀하였다.


  그 후, 실학은 농업 중심의 개혁론,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 국학 연구 등을 중심으로 널리 확산되었으며, 이 시기에 청에서 전해진 고증학과 서양 과학의 영향을 크게 받기도 하였다. 실학은 18세기에 가장 활발하게 발달하였으며, 대부분의 실학자는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였기에 비판적이면서도 실증적인 논리로 사회 개혁론을 제시하였다.

 


<농업 중심의 개혁론>


  18세기 전반에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제시한 실학자들은 농민의 입장에서, 농촌 사회의 안정을 꾀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토지 제도를 비롯한 각종 제도 개혁을 추구하였다.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펼친 이들을 경세치용 학파라고도 부른다. 이 학파는 공통적으로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경세치용 학파의 선구자는 17세기 후반에 활약한 유형원이다. 유형원은 일생 농촌에서 생활하면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며 반계수록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유형원은 균전론을 내세웠다. 유형원의 균전론은 관리, 선비, 농민 등 신분에 따라 차등 있게 토지를 재분배하고, 조세와 병역 역시 조정하자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 개혁의 중요성을 주장하였고, 양반 문벌제도, 과거 제도, 노비 제도의 모순을 비판하였다.


  유형원의 뒤를 이어 농업 중심 개혁론을 더욱 발전시킨 사람은 18세기 전반에 주로 활약했던 이익이었다. 그는 유형원의 실학 사상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많은 제자를 양성해 성호 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 개혁론으로 한전론을 주장하였다. 이익의 한전론은 한 가정이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규모의 토지를 영업전으로 정한 다음, 영업전은 법적으로 매매를 금지하고, 나머지 토지만 매매를 허용하자는 내용이었다. 그 외에도 나라를 좀먹는 여섯 가지의 폐단(노비 제도, 과거 제도, 양반 문벌제도, 사치와 미신, 승려, 게으름)을 지적한 좀론을 주장하였다.

 

  이익의 실학 사상을 계승하면서 실학을 집대성한 최대의 학자는 정약용이었다. 정약용은 지방 행정의 개혁에 대하여 저술한 목민심서, 중앙 행정 개혁에 대하여 쓴 경세유표 등을 비롯하여 5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그는 토지 제도의 개혁론으로 처음에는 여전론을 내세웠으나 훗날에는 정전제를 현실에 맞게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정약용은 과학 기술과 상공업의 발달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 정약용의 여전론

 

  이제 농사짓는 사람은 토지를 가지게 하고, 농사짓지 않는 사람은 토지를 가지지 못하게 하려면, 여전제를 실시해야 한다. 산골짜기와 시냇물의 지세를 기준으로 구역을 획정하여 경계를 삼고, 그 경계선 안에 포괄된 지역을 1여로 한다. ······ 1여마다 여장을 두며, 무릇 1여의 인민이 공동으로 경작하도록 한다. ······ 여민이 농경하는 경우, 여장은 매일 개개인의 노동량을 장부에 기록하여 두었다가 가을이 되면 오곡의 수확물을 모두 여장의 집에 가져온 다음에 분배한다. 이때, 국가에 바칠 세와 여장의 봉급을 제하며, 그 나머지를 가지고 노동 일수에 따라 여민에게 분배한다.

<여유당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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