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변혁의 움직임
<천주교의 전파>
천주교는 17세기 중국 베이징의 천주당을 방문했던 우리나라 사신들에 의해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학문으로 소개되었던 천주교가 신앙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당시 정치와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민하던 남인 계열의 일부 실학자들이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서양인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후부터 천주교 신앙 활동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초기에 정부는 천주교가 유포되는 것에 대해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저절로 사라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점차 교세가 확장되고 천주교가 조상에 대한 유교적 제사 의식을 거부하자,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부정과 국왕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사교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정조 때에는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으로 관대하였으나, 순조가 즉위한 직후에 대탄압이 가해졌다(신유박해, 1801). 이 사건으로 천주교 전례 전파에 앞장섰던 실학자 및 많은 수의 양반 계층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안동 김 씨의 세도 정치기에는 천주교 탄압이 완화되면서 백성 사이에서 활발하게 전파되었다. 이때 조선 교구가 설립되고, 서양인 신부가 몰래 들어와 포교하면서 천주교 교세가 확장되어 갔다.
천주교의 교세가 이처럼 확장된 것은 세도 정치로 인한 사회 불안과 어려운 현실에 대한 불만, 그리고 신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논리, 내세 신앙 등의 교리가 일부 백성에게 큰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동학의 발생>
동학은 1860년에 경주 출신 최제우가 창도하였다. 동학에는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회가 처한 다양한 사회 문제 상황들이 반영되었다. 동학의 교리는 유·불·선의 주요 내용을 바탕으로 하였지만, 주문과 부적과 같은 민간 신앙 요소들도 결합되었다. 또한 사회 모순을 극복하고, 일본과 서양 국가의 침략을 막아내자는 주장도 담겼다.
동학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시천주와 인내천 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렇기에 양반과 상민을 차별하지 않고, 노비 제도를 없애며, 여성과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는 사회를 추구하였다. 하지만 조선 지배층은 신분 질서를 부정하는 동학을 위험하게 여겨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현혹한다는 죄로 최제우를 처형하였다.
최제우의 뒤를 이은 최시형은 교세를 확대하면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편찬하여 동학의 교리를 정리하는 한편, 의식과 제도 정착을 통해 교단 조직을 정비하였다. 이로 인해 다시 교세가 커진 동학은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는 물론 강원도와 경기도 일대까지 퍼져 나갔다.
<농민의 항거>
국가 기강이 해이해진 19세기의 세도 정치하에서 탐관오리의 부정부패는 끝이 없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수취 제도의 문란이었던 전정, 군정, 환곡을 뜻하는 삼정의 문란으로 극도에 달한 수령의 부정부패는 중앙 권력과도 밀접한 연계가 있었기에, 암행어사의 파견만으로 막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이처럼 농촌 사회는 피폐해져 갔지만, 농민의 사회의식은 오히려 더욱 강해졌다.
농민은 지배층의 수탈에 대해 기존의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으로 그들과 대결하였다. 처음에는 남을 비방하거나 민심을 선동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몰래 붙이는 게시물이었던 벽서, 괘서 등의 형태로 나타났던 농민의 항거는 점차 농민 봉기로 변화해갔다. 농민의 항거 중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평안도에서 발생했던 홍경래의 난(1811)과 단성에서 시작하여 곧이어 진주로 파급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된 임술 농민 봉기(1862)가 있다.
홍경래의 난은 몰락 양반이었던 홍경래의 지휘 아래 영세 농민, 중소 상인, 광산 노동자 등이 합세하여 일으킨 봉기였다. 이들은 가산에서 처음 난을 일으켜 선천, 정주 등을 별다른 저항 없이 점거하였다. 한때는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하였지만, 5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홍경래의 난 이후에도 사회 불안은 수그러들지 않았기에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하지만 관리들의 부정과 탐학은 전혀 시정되지 않았다.
임술 농민 봉기는 진주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이때 농민들은 탐관오리와 토호의 탐학에 저항하여 한때는 진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북쪽의 함흥으로부터 남쪽의 제주에 이르기까지 농민의 항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저항을 겪으며 농민들의 사회 의식은 성장하였고, 농민들의 항쟁으로 말미암아 양반 중심의 통치 체제도 점차적으로 무너져 갔다.
● 홍경래의 격문
평서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니 관서의 부로와 자제와 공·사 천민들은 모두 이 격문을 들으라. 무릇 관서는 성인 기자의 옛 터요 단군 시조의 옛 근거지로서 의관이 뚜렷하고 문물이 아울러 발달한 곳이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관서를 버림이 분토와 다름없다. 심지어 권세 있는 집의 노비들도 서토의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 놈'이라고 말한다. 어찌 억울하고 원통하지 않은 자 있겠는가.······
지금, 임금이 나이가 어려 권세 있는 간신배가 그 세를 날로 떨치고, 김조순·박종경의 무리가 국가 권력을 오로지 가지고 노니, 어진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
이제 격문을 띄워 먼저 여러 고을의 군후에게 알리노니, 절대로 동요하지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만약 어리석게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철기 5000으로 남김없이 밟아 무찌르리니, 마땅히 속히 명을 받들어 거행함이 가하리라. 대원수.
<패림>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근대 태동기의 문화 - 실학의 발달(2) (0) | 2023.01.29 |
---|---|
근대 태동기의 문화 - 성리학의 변화, 실학의 발달(1) (0) | 2023.01.29 |
근대 태동기의 사회 - 향촌 질서의 변화, 사회 변혁의 움직임(1) (0) | 2023.01.28 |
근대 태동기의 사회 - 사회 구조의 변동 (0) | 2023.01.28 |
근대 태동기의 경제 -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1) | 2023.01.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