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촌 질서의 변화
<양반의 향촌 지배 약화>
경제적 변동과 신분제의 동요 속에서 사족이 중심이 되었던 향촌 질서도 변화하였다. 평민과 천민 중 재산을 축적하여 부농층으로 성장한 사람도 있었으며, 양반 중에서도 토지를 잃고 몰락하여 전호가 되거나 심한 경우에는 임노동자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향촌 사회 내에서 양반이 지녔던 권위도 점차 약해졌다.
양반의 권위 약화로 군현 단위의 농민을 지배하기 어렵게 되자, 촌락 단위의 동약을 시행하거나, 족적 결합을 강화함으로써 자기들의 지위를 지켜 나가고자 하였다. 이에 다라 전국에 많은 동족 마을이 만들어졌고, 문중을 중심으로 한 서원과 사우가 많이 설립되었다.
향촌 사회에서 이전까지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양반은 새로 성장한 부농층의 도전을 받았다. 요호 부민이라 불렸던 조선 후기 신흥 세력인 부농층은 자기의 전지를 소유하고 지방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경제력을 갖춘 부농층은 수령을 중심으로 한 관권과 결탁하여 향안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으며, 향회를 장악하여 향촌 사회 내에서 영향력을 키우려 하였다. 이들은 기존의 재지 사족이 담당하던 정부의 부세 제도 운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향촌에 있는 향청(유향소)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향임직에 진출하기도 하였으며, 기존 향촌 세력과의 타협을 통해 향촌 사회 내에서 상당한 지위와 영향력을 확보해갔다. 하지만 모든 부농층이 그러한 것은 아니었고, 향촌 지배에 참여하지 못한 부농층도 여전히 많았다.
<농민층의 분화>
조선 후기에도 여전히 지주의 대부분은 양반이었지만, 일반 서민 중에서도 농지 확대, 영농 방법 개선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부를 축적하여 지주가 된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재력을 바탕으로 공명첩을 사거나 족보를 위조하여 신분 상승을 꾀하기도 하였다.
양반이 되면 군역을 면하는 등의 이익이 있었으며, 양반 지배층의 수탈을 피해 부를 더욱 쉽게 축적할 수 있었다. 이렇게 양반 신분을 사들인 농민은 더 나아가 향촌 사회 안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한편, 일부 농민은 부농층으로 성장하여 더욱 부를 축적하는 반면에, 일부 농민은 오히려 토지에서 쫓겨나 임노동자가 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16세기 이후 부역제가 와해되면서 노동력을 동원하기 어려워진 국가나 관청에 노임을 받고 성을 쌓거나 도로 공사 등에 동원되었다. 또한 가족의 노동력만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부농층에 고용되어 힘든 삶을 영위해 나갔다. 부농층의 대두 그리고 임노동자의 출현은 이 시기 농민층이 분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관권의 강화>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부농층의 성장 욕구는 재정 위기를 타개하고자 하는 정부의 이해관계와 맞물렸고, 정부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하였다. 정부는 납속 또는 향직 매매 등을 통하여 부농층이 합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기도 하였다.
기존의 재지 사족의 힘은 약화되고, 부농층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향촌 세력의 힘은 충분히 강해지지 못했기에, 조선 후기 향촌 사회에서는 수령을 중심으로 한 관권이 강화되었고, 더불어 관권을 맡아 보좌하던 향리의 역할이 커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래에 재지 사족인 양반의 이익을 대변하던 향회는 수령이 세금을 부과할 때 의견을 물어보는 자문 기구로 구실이 변하였다. 이는 곧 수령 중심의 국가 권력이 향촌 사회 깊숙하게 침투하여 재지 사족이 지배하고 있던 영역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관권의 강화는 세도 정치 시기에 정치 기강이 무너지는 상황 속에서 수령과 향리의 자의적인 농민 수탈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사회 변혁의 움직임
<사회 불안의 심화>
신분제의 동요는 조선 시대 양반 중심의 지배 체제에 커다란 위기를 가져왔다. 지배층과 농민층 사이의 갈등은 심화되었으며, 지배층의 수탈이 심해지자 농민 경제는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농민의 의식은 점차 고취되어 곳곳에서 수탈에 대한 적극적인 항거 운동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관오리의 수탈과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으며, 재난과 질병도 거듭 발생하였다. 특히, 19세기에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해져 농민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1820년에는 전국적인 수해가 발생했고, 이듬해에는 콜레라의 만연으로 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는 비참한 사태가 발생하였고, 이 피해는 그 후 수 년동안 계속되었으며, 이에 따라 굶주려 떠도는 백성이 거리를 메울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백성 사이에서는 비기, 도참설 등이 널리 퍼졌고, 서양의 이양선까지 연해안에 출몰하자,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졌다. 사회 불안이 심화됨에 따라 각처에는 도적이 크게 일어나기도 하였다. 화적은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 지방의 토호나 부상을 공격하였고, 수적은 배를 타고 강이나 바다를 무대로 조운선이나 상선을 약탈하였다.
<예언 사상의 대두>
사회 변화에 따라 유교적 명분론이 설득력을 잃어가자 비기, 도참 등을 이용한 예언 사상이 백성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다. 말세의 도래, 왕조의 교체, 변란의 예고 등 근거 없는 낭설이 유행하여 민심을 혼란시켰다. 이 시기에 가장 널리 유행했던 비기는 정감록이었다.
이러한 예언 사상과 더불어 무격 신앙 또는 미륵 신앙도 점차 확산되어 갔다. 현세에서 얻지 못한 행복을 미륵 신앙을 통해 해결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으며, 심지어 살아있는 미륵불을 자처하며 서민을 현혹시키고 끌어모으는 무리도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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