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경제의 발전
<양반 지주의 경영 변화>
양 난 이후, 양반은 토지 개간에 주력하면서 농민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사들여 농토를 늘렸다. 그렇게 넓힌 토지를 소작 농민에게 빌려주고 소작료를 받는 지주 전호제로 농장을 경영하였는데, 지주 전호제는 18세기 말에 이르러 보편적으로 시행되었다.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지주 전호제도 변화해갔다. 양반은 양반과 지주라는 신분적·경제적 지위를 이용하여 농민에게 소작료와 그 밖의 부담을 자유롭게 강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작인의 저항이 점차 심해지자, 소작인의 소작권을 인정하고, 소작료도 정액화하거나 감면하는 추세가 나타났다. 결국 지주 전호제가 지주와 전호 사이의 신분적인 관계이기보다 경제적인 관계로 변화하였다.
대부분의 양반은 소작료를 거두어 생활하거나, 소작료로 받은 미곡을 시장에 팔아 이윤을 남겼다. 또한 토지에서 생기는 수입을 통해 토지 매입에 더욱 힘썼다. 그리하여 천석꾼, 만석꾼이라 불리는 대지주들이 등장하였다.
물주로서 상인에게 자금을 대거나 고리대를 하여 부를 축적하는 양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적으로 급격하게 변화하는 과정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여 몰락하는 양반도 적지 않았다.
<농민 경제의 변화>
농민은 황폐해진 토지를 다시 개간하고 수리 시설을 복구하였으며, 생산력 향상을 위하여 농기구와 시비법을 개량하고, 새로운 영농 방법을 시도하였다.
모내기법이 확대되어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해져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증가하고 소득도 증대되었다. 이모작이 널리 행해짐에 따라 보리 재배가 확대되었고, 논에서의 보리농사는 주로 소작료의 수취 대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작농들은 보리농사를 선호하였다.
농민은 농업을 경영하는 방식도 변화시켰다. 모내기법을 통해 잡초를 제거하는 일손이 줄어들자, 농민은 경작지의 규모를 확대하였다. 지주들 역시 직접 경작하는 토지를 넓혔지만, 자작농은 물론 일부 소작농도 더 많은 농토를 경작하여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이러한 광작 농업으로 농가의 소득이 늘어났고 이를 통해 부농이 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농민들은 시장에 팔기 위한 상품작물을 재배하여 가계 수입을 증가시켰다. 전국에 장시가 점점 증가하여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졌고, 이를 통해 농민은 쌀, 목화, 채소, 담배, 약초 등을 재배하여 판매하였다. 특히, 쌀의 상품화가 활발하였다. 이 시기에 쌀은 그 수요가 매우 증가하여 장시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었다. 이처럼 쌀의 수요가 늘어나자 밭을 논으로 바꾸는 전답 현상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소작하던 농민은 지주로부터 좀 더 유리한 경작 조건을 얻어내기 위하여 지주에게 대항하여 소작 쟁의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작권을 인정받아 지주가 소작지를 함부로 빼앗지 못하고, 수확량의 반이나 내던 소작료도 일정 액수를 곡물이나 화폐로 내는 등의 변화가 나타났다. 소작농이라도 상품 작물을 재배하거나 소작권을 인정받고 소작료도 일정 액수만 납부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근면 성실하고 시장 경제를 잘 이용하는 농민은 소득을 점차 증가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일부 농민은 토지를 개간하거나 매입하여 지주가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소득을 증대시켜 부자가 되는 농민도 있는 반면에, 토지를 잃고 몰락하는 농민의 수도 증가하였다. 부세의 부담, 고리채의 이용, 관혼상제 비용 부담 등으로 견딜 수 없게 된 가난한 농민은 자신의 토지를 헐값에 넘겼고, 양반 관료, 토호, 상인 등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토지를 매입하여 부를 더욱 축적하였다.
광작이 가능해지면서 대부분의 농토를 소작시키고 일부 농토만을 직접 경영하던 지주들도 소작농으로부터 소작지를 회수하고, 노비를 늘리거나 머슴을 고용하여 농토를 직접 경영하였다. 이로 인해 소작 농민은 소작지를 쉽게 잃게 되고 다시 얻기는 어렵게 되었다.
농촌을 떠난 농민은 도시로 이동해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광산이나 포구를 찾아 임노동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광산, 포구 등에는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기도 하였는데, 황해도의 수안, 충청도의 강경 그리고 함경도의 원산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민영 수공업의 발달>
조선 후기에 상품 화폐 경제가 발전하면서 시장에 판매하기 위한 수공업 제품의 생산이 활발해졌다. 이 시기에 도시 인구가 급증하여 제품의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났고, 대동법의 시행으로 관수품의 수요도 커졌기 때문이다.
민간 수공업자들은 장인세만 납부하면 비교적 자유롭게 생산 활동에 종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관영 수공업장에서 생산된 제품보다 품질과 가격 측면에서 훨씬 더 경쟁력이 있었다.
민간 수공업자의 작업장은 주로 점이라고 부르는데, 철기 수공업체는 철점, 사기 수공업체는 사기점이라 하였다.
민간 수공업자들은 주로 소규모의 작업장 및 자본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료를 구입하거나 제품을 처분할 때 상업 자본의 지배를 많이 받았다. 대부분 공인 또는 상인에게 주문을 받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금과 원료를 미리 받아 제품을 생산하는 선대제가 널리 퍼졌다.
하지만 18세기 후반이 되면 수공업자 가운데서도 독자적으로 제품을 생산하고 이를 직접 판매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농촌의 수공업 역시 여태까지는 자급자족을 위한 부업의 형태로 행해졌으나, 점차 소득을 증가하기 위하여 상품으로 생산하는 경우가 증가했고, 더 나아가 전문적으로 물품을 생산하는 농가도 등장하였다. 농촌에서는 주로 옷감, 그릇 종류를 생산하였다.
<민영 광산의 증가>
조선시대에 광산은 원래 정부가 독점하여 필요한 광물을 채굴하는 방식이었다. 17세기 중엽 조선 정부는 민간인에게 광산 채굴을 허가하고 세금을 받는 정책을 실시하였고, 이에 민간인의 광업 활동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청과의 무역으로 은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은광 개발이 활기를 띠었다. 17세기 말에는 70여개소의 은광이 개발되었고, 18세기 말에는 상업 자본이 채굴과 제련이 용이한 사금 채굴에 몰리면서 금광도 활발하게 개발되었다. 광산을 개발하면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합법적인 경우도 존재했지만 몰래 불법적으로 채굴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 후기 광산은 일반적으로 경영 전문가인 덕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덕대는 광산의 주인과 계약을 체결하고 광물을 채굴하여 광산을 경영하는 사람으로, 대개 상인 물주에게 자본을 조달받고 이를 사용해 채굴업자와 채굴 노동자, 제련 노동자 등을 고용하여 광물을 채굴하고 제련하였다. 이 작업 과정은 분업을 바탕으로 하며 각각의 노동자가 서로 협업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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