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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근대 태동기의 정치 - 통치 체제의 변화, 붕당 정치의 전개와 탕평 정치(1)

by 밍밍S2 202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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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체제의 변화

<정치 구조의 변화>

  붕당 정치가 점차 전개되면서 정치 구조적인 면에서는 비변사의 기능이 확대되고, 3사의 기능이 변하는 등 여러 변화가 나타났다. 16세기 중종 초에 여진족과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임시 회의 기구로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초기의 비변사는 3정승이었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3정승을 비롯하여 전·현직 정승, 공조를 제외한 5조의 판서와 참판, 각 군영의 대장, 대제학, 강화유수 등 국가의 주요 관원들로 확대됐으며, 그 기능도 단순 군사 문제뿐만 아니라 외교, 재정, 사회, 인사 등 대부분의 정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이처럼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자, 의정부와 6조 중심의 행정체계는 유명무실해졌다.

 

  한편 언론을 담당하던 3사의 기능도 변질하였다. 청요직이라고 불리던 과거와는 다르게 3사는 각 붕당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 3사는 공론을 반영하기보다는 상대 붕당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자기 붕당 세력을 유지하고 상대 세력을 견제하는 데 앞장섰다. 더불어 이조와 병조의 전랑들 역시 중하급 관원들에 대한 인사권 및 자기 후임자 추천권을 행사하면서 자기 세력을 확장하고 상대 세력을 몰아내는 데 앞장서고 있었다.

 

<군사 제도의 변화>

  조선 초기의 중앙군은 5위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나, 16세기 이후 군역의 대립제가 일반화되면서 그 역할과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 초반에 어이없는 패전을 경험한 중앙 정부에서는 새로운 군대의 필요성을 느끼고, 왜군을 물리치는 데 효과적인 편제 및 군사 훈련 방식을 모색하였다. 그렇게 하여 설치된 것이 바로 훈련도감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조총에 대항하기 위하여 기존의 창과 활로 무장한 부대에 더하여 조총으로 무장한 부대를 새롭게 창설하였다. 이에 훈련도감은 포수, 사수, 살수의 삼수병으로 편제되었다. 훈련도감의 군병은 장기간 근무를 하고 일정한 급료를 받는 상비군으로서, 직업 군인의 모습을 띠는 군인이었다.

 

  훈련도감에 이어 대외 관계 및 국내 정세 변화에 따라 군영이 추가로 설치되었다. 후금과의 전쟁 당시, 국방력 강화를 명분으로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등이 설치되었고, 숙종 때에는 금위영이 추가로 설치되었다. 이로써 17세기 말에는 5군영 체제가 완성되었다.

 

  지방군의 방어 체제도 변화하였다. 조선 초기에 실시되었던 진관 체제는 많은 수의 외적의 침임에는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제승방략 체제가 수립되었다. 제승방략체제는 유사시에 필요한 방어처에 각 지역의 병력을 동원하고, 중앙에서 파견되는 장수가 그 병력을 지휘하게 하는 방어 체제였다. 하지만 이것도 임진왜란 중에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다시 진관을 복구하였으며 속오법에 따라 군대를 편성하는 속오군 체제로 정비하였다.

 

  속오군은 양반에서부터 노비에 이르는 남성들이 편제되어,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적이 침입해 오면 전투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양반은 노비와 함께 속오군에 편제되는 것을 회피함에 따라 결국에는 상민과 노비만 속오군에 남게 되었다. 

 

붕당 정치의 전개와 탕평 정치

<붕당 정치의 전개>

  선조 때에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후, 처음에는 동인이 우세한 상황에서 정국이 운영되었다. 정여립 모반 사건 등을 계기로 동인은 온건파인 남인과 급진파인 북인으로 나뉘었다. 처음에는 남인이 권력을 잡고 정국을 운영하였으나, 임진왜란이 끝난 뒤 북인이 정권을 잡고 광해군 때까지 정국을 주도하였다.

 

  북인은 서인과 남인을 배제한 채 정권을 독점하려 하였다. 결국 이들은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에 의해 몰락하였다(1623). 서인은 다른 붕당을 배제한 것이 아니라 남인 일부와 연합하고 정국을 운영해 나갔다. 서인과 남인 모두 학파적으로 확고하게 결속된 정파들이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서로의 학문적 입장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상호 비판적인 공존 체제를 유지해갔다.

 

  이러한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과 연합하는 상호 비판적 공존 체제의 붕당 정치는 헌종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헌종 때에 선왕 효종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정통성 문제가 대두되어 두 차례의 예송이 발생하게 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의 대립은 격화되었다. 두 차례의 예송은 효종의 새어머니였던 인조의 계비가 효종 그리고 효종비가 죽은 후 상복을 어떻게 입을 것인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다. 효종이 차남이었기 때문에,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두 차례 심각한 정치적 논쟁이 벌어졌다.

 

<붕당 정치의 변질과 탕평론의 대두>

  숙종 때에는 붕당 정치가 변질하여 환국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환국이란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하는 붕당이 서로 교체됨으로써 정국이 급격하게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상호 공존체제가 아닌 특정 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대립하였으며, 나중에는 서인에게서 갈라져 나온 노론과 소론이 격하게 경쟁하였다.

 

  숙종은 이러한 환국을 왕이 직접 주도하였기에, 외척이나 종실 등 왕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집단의 정치적 비중이 높아졌다. 정치권력은 점점 고위 관료들에게 집중되었으며, 언론 기관 그리고 재야의 사족들은 점점 정치에 참여하기 힘들어졌고 이에 따라 붕당 정치의 기반도 무너지게 되었다.

 

  붕당 정치가 변질되어감에 따라 정치 집단 간의 세력 균형 또한 무너졌고, 왕권 역시 불안해졌다. 이에 강력한 왕권을 토대로 국왕이 정치의 중심이 되어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이 제기되었다.

 

  숙종의 탕평론은 인사 관리를 통해 붕당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황 또는 사건에 따라 한 당파를 일제히 내몰고 상대 당파에 정권을 일임하는 지나치게 편당적인 인사 관리였기 때문에 환국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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