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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근대 태동기의 경제 - 수취 체제의 개편

by 밍밍S2 202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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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취 체제의 개편

<농촌 사회의 동요>

  임진왜란 그리고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농촌 사회는 심각한 수준으로 파괴되었다. 수많은 농민이 전쟁 중에 사망하거나 피난을 갔고, 경작지는 황폐해졌다. 게다가 기근과 질병까지 널리 퍼져서 농촌 생활의 어려움은 극에 달하였다. 하지만 농민의 조세 부담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양반 지배층은 정치적 다툼에만 관심이 있었고, 민생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지배층에 실망한 농민들을 겉으로 불만을 드러내고 스스로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국가는 수취 체제를 개편하여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고 국가의 재정 기반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이는 전세 제도, 공납 제도 그리고 군역 제도의 개편으로 나타났다.

 

<전세의 정액화>

  두 번의 전쟁을 겪은 후 조선 정부는 농경지의 황폐화와 전세 제도의 문란에서 가장 큰 어려움을 겪었다. 임진왜란 직전의 전국 토지는 150만 결이었는데, 직후에는 30여만 결로 크게 줄었다. 이에 정부는 개간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여 빠르게 경작지를 확충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전세 확보를 위하여 토지 조사 사업도 진행했다. 이는 토지 대장인 양안에서 누락된 토지를 찾아내 전세의 수입원을 증대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으로 농민의 삶을 향상할 수는 없었다. 농민은 이러한 정책보다는 실질적으로 자신들의 고통을 줄여 주는 정책을 원하였다. 이에 정부는 연분9등법을 따르지 않고 풍흉에 관계없이 전세를 토지 1결당 미곡 4두로 고정하는 영정법을 시행하였다(1635).

 

  이러한 개편을 시행하자 전세의 비율이 이전보다 다소 낮아졌다. 하지만 대다수의 농민에게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부담이 더 늘어났다. 전세를 납부할 때 여러 명목의 수수료, 운송비, 자연 소모에 대한 보충 비용 등이 추가로 부과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액수가 전세 납부액보다 훨씬 많아 때로는 전세액의 몇 배가 되기도 하였다.

 

<공납의 전세화>

  양난 이후 조선 농민들에게 가장 큰 부담이 되었던 것은 전세가 아닌 공납이었다. 특히 방납의 폐해가 대두되면서 농민의 부담은 더욱 커져만 갔다. 부담을 이기지 못한 농민들은 농토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농민의 토지 이탈은 농촌 경제가 파탄되어 나타난 결과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조세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정부의 재정 상태가 점차 악화하자, 부족한 국가 재정 보완, 그리고 농민의 부담 경감을 위한 개혁론이 제기되었고, 그 결과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대동법은 먼저 경기도에서 시범적으로 시행되었고 점차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대동법은 가호마다 부과하여 토산물을 징수하던 공물 납부 방식을 토지 결수에 따라 쌀, 삼베, 무명 동전 등으로 납부하게 하는 제도였다.

 

  대동법에 따르면 농민은 토산물 대신 토지 1결당 미곡 12두만 납부하면 되었다. 이에 따라 토지가 없거나 적은 농민은 그동안 과중하게 부과되던 공물의 부담이 없어지거나 상당부분 경감되었다.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공인이라 불리는 어용 상인이 등장했다. 이들은 관청에서 공가를 미리 받고 필요한 물품을 사서 납부하였다. 공인이 시장에서 많은 물품을 구매하였기 때문에 상품의 수요가 증가하였다. 농민도 대동세를 내기 위해 토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고 쌀, 베, 돈을 마련하였다. 이렇게 물품의 수요와 공급이 증가하면서 조선의 상품 화폐 경제가 한층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후 대동법의 운영 과정 역시 폐단을 겪게 되면서 농민들은 다시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균역법의 시행>

  양 난을 겪은 후 5군영이 성립되어 모병제가 제도화되었다. 이에 군영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포를 내어 군역을 대신하는 수포군이 점차 증가하였다. 하지만 5군영은 물론, 지방의 감영이나 병영까지도 독자적으로 군포를 징수하면서 장정 한 명에게 이중 삼중으로 군포를 부담시키는 경우가 생겼다. 그들이 바치는 군포의 양도 소속에 따라 2필 또는 3필 등으로 다르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 납속이나 공명첩으로 양반이 되는 경우가 많아져 군역이 면제되는 자가 증가하자 군역의 재원은 점차 줄어들었다. 여기서 납속은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고 빈민을 구제할 목적으로 돈이나 곡물을 납부한 사람에게 특혜를 주는 정책을 말한다. 면천과 면역은 물론 관직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공명첩이란 나라의 재정을 보충하기 위하여 부유층으로부터 돈이나 곡식을 받고 팔았던 명예직 임명장이다. 게다가 전국의 장정 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재정 상태가 어려워지자 군포의 부과량을 점차 늘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군역의 부담이 과중해지자, 농민은 도망가거나 노비 또는 양반으로 신분을 바꾸어 군역을 피하는 상황이 생겼다. 결국 군역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개혁 방안의 논의가 있었고, 마침내 영조 대에 균역법이 시행되었다. 이로써 농민은 1년에 군포 1필만 납부하면 되었다.

 

  균역법이 시행되면서 감소한 재정은 지주에게 결작이라는 이름으로 토지 1결당 미곡 2두를 부담시켰고, 일부 상류층에게는 선무군관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군포 1필을 납부하게 하였으며, 어장세, 선박세 등의 잡수입으로 보충하게 하였다. 하지만 토지에 부과되는 결작의 부담은 다시 소작 농민에게 돌아갔으며, 군적의 문란이 심해져 농민의 부담은 다시 가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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