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 정치의 전개와 탕평 정치
<영조와 정조의 탕평 정치>
서인이 남인을 역모로 몰아 정권을 독점한 경신환국(1680) 이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노론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대의명분을 중시하고, 민생 안정을 강조하는 정책을 펼쳤지만 소론은 윤증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실리를 중시하고, 적극적인 북방 정책을 주장하는 경향을 보였다.
숙종의 탕평 정치는 불완전했지만, 영조가 즉위하면서 탕평 정치는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사실 탕평이란 서경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정치가 한쪽의 편을 들지 않고 사심이 없으며, 당을 이루지도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영조는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를 펼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 공론의 주재자로 인식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붕당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으며,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하기 위해 그들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하던 관행을 없앴으나, 실제로 이조 전랑의 후임자 자천권은 정조대에 가서야 완전하게 폐지되었다.
영조가 탕평 정치를 실시하면서, 왕권은 강화되었다. 정국의 운영과 이념적 지도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부문에서 왕은 가장 큰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비로소 붕당의 정치적 의미는 차츰 옅어졌다.
안정된 정국을 바탕으로 영조는 민생 안정과 산업 진흥을 위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균역법(1750)을 시행하여 백성의 군역 부담을 줄여주었으며,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엄격하게 시행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속대전을 편찬하여 법전 체계도 다시 정비하였다.
하지만 영조의 탕평 정치는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붕당 사이의 치열했던 대립과 다툼을 일시적으로 억누른 것에 불과하였다.
정조는 적극적인 탕평책을 추진하였다. 자신이 직접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 명백히 가려내어 영조 때에 세력을 키워 온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남인과 소론 계열도 중앙 정계에 등용하였다. 붕당이 비대해지는 것을 막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뒷받침하기 위하여,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중에서 유능한 인사를 재교육하는 초계문신제도를 실시하였으며, 본래 역대 왕의 글과 책을 수집하고 보관하는 왕실 도서관의 기능을 하던 규장각에 비서실의 기능과 문한 기능, 그리고 과거 시험의 주관과 문신 교육의 임무까지 부여하여 이를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왕권을 뒷받침하였다. 더 나아가 사도 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화성을 건축하여 정치적·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도시로 만들고자 하였다. 또한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군현 단위의 향약을 수령이 직접 주관하게 하여 지방 사림의 영향력을 줄였다.
정치 질서의 변화
<세도 정치의 전개>
정조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탕평 정치를 펼쳤지만, 왕에게 집중되었던 권력은 결과적으로 세도 정치가 시작되는 빌미가 되었다. 정조가 죽은 후 3대 60여 년 동안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같은 왕의 외척 세력에 의해 정국이 운영되었다. 이를 세도 정치라고 하는데, 세도 정치기에는 붕당은 물론, 탕평파와 반탕평파 같은 정치 집단 사이의 대립 구도 자체가 없어졌으며 그 기반이 축소되었고, 소수의 가문 출신만이 중앙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다.
세도 정치하에서는 고위직만 정치적 기능과 능력을 발휘하였고, 그 아래의 관리는 언론 활동과 같은 정치적 기능을 거의 상실한 채 행정 실무만을 맡게 되었다. 임시 기구였던 비변사가 핵심적인 정치 기구로 자리를 잡았으며, 유력 가문의 출신들 몇몇이 실권을 행사하였다.
<세도 정치의 폐단>
19세기의 3대 60여 년에 걸친 세도 정치는 사회 전반의 변화 모습을 인지하지 못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능력도 지니지 못하였다. 세도 정권은 정조가 등용하였던 재야의 세력인 남인, 소론, 지방 선비들을 중앙 정권에서 완전히 배제하여 사회 통합에 실패하였다. 향촌에서는 지방 사족을 배제하고 수령이 절대권을 행사하여 조세를 거두도록 하기도 하였다.
세도 정치기에는 관직 매매와 같은 사회적 비리들이 만연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탐관오리들이 넘쳐나 부당한 조세 수탈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자연재해가 잇따라 기근과 질병이 널리 퍼지고, 인구가 급속하게 감소하였지만, 농민의 조세 부담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더욱 무거워졌다. 이에 농촌 사회의 불만은 극에 달하였고, 부당한 수탈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도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대외 관계의 변화
<청과 관계>
병자호란 이후, 표면상 조선은 청에 대하여 사대 관계를 맺었으며 사신이 왕래하고 교역을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하지만 내적으로는 청에 대한 적개심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북벌 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특히 효종은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 청에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가졌던 이들을 주로 등용하여 군대 양성, 성곽 수리 등의 북벌 운동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그 후, 숙종 때에도 청의 정세 변화를 이용하여 윤휴를 중심으로 북벌 운동이 제기되었으나, 현실적으로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이 시기 청의 상황은 중국 대륙을 장악한 뒤, 국력이 크게 향상되었고 중국 전통문화를 보호, 장려하면서 서양의 문물까지 받아들여 문화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조선의 사신단은 청에서 귀국한 뒤에 기행문이나 보고서 등을 작성하여 변화하는 청의 사정을 국내에 전달하였고,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후 몇몇 학자들 사이에서 청의 문화를 무조건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로운 것을 선별하여 적극적으로 배우자는 북학론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한편, 청은 중국 본토 대륙을 차지한 이후에도 그들의 본거지였던 만주 지방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이 지역을 성역화하였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부가 두만강을 건너 만주 지방에서 인삼을 캐거나 사냥을 하는 경우가 있어서 청과 국경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에 조선과 청, 두 나라의 대표가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국경을 확정하여 정계비를 세웠다(1712). 이 정계비에 따르면 양국 간의 국경은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고 하였다.
<일본과 관계>
임진왜란으로 침략을 받았던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였다. 하지만 에도 막부는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고 선진 문물을 조선으로부터 받아들이기 위하여 쓰시마 섬 도주를 통해 국교 재개를 요청해왔다. 조선은 막부의 사정을 파악하고, 전쟁 때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기 위해 유정(사명대사)를 파견하여 일본과 강화하고 포로 7000여 명을 데려왔다(1607). 그리고 동래부에 다시 왜관을 설치하였으며, 일본과 기유약조를 맺어 제한된 범위 내의 교역을 허용하였다(1609).
한편, 일본은 조선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고, 에도 막부의 쇼군이 바뀔 때마다 그 권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조선에 사절단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총 12회에 걸쳐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통신사 일행은 많게는 4~500여 명, 적게는 300여 명의 규모였으며, 일본에서는 이들을 국빈으로 예우하였다. 일본은 통신사를 통하여 조선의 선진 학문과 기술을 습득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통신사는 외교 사절의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조선의 선진 문화를 일본에 전달하는 역할도 하였다.
삼국 시대 이래 우리의 영토였던 울릉도와 독도에 일본 어민이 자주 침범하여 대립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숙종 때, 안용복은 울릉도에 출몰하는 일본 어민들을 내쫓고, 일본에 직접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받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 후에도 일본 어민의 침범이 지속되자, 19세기 말에 조선 정부는 울릉도로 주민 이주를 장려하고, 울릉군을 설치하여 관리를 파견하고 독도까지 관할하게 하는 등, 적극적인 울릉도 경영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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