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문화의 융성
<발달 배경>
조선 초기에는 민족적인 동시에 실용적인 학문이 발달하여 다른 시기보다 민족 문화가 크게 발달할 수 있었다. 당시의 집권층이었던 관학파는 민생 안정 및 부국강병을 목표로 과학 기술과 실용적인 학문을 중시하였다. 또한, 민족 문화 발달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우리의 문자인 한글 창제를 통해 민족 문화의 기반을 세우고 민족 문화가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
이들 관학파는 15세기의 문화 발전을 주도하였는데, 성리학을 기본적인 지도 이념으로 내세웠지만, 부국강병과 중앙 집권 체제의 강화 그리고 민생 안정에 도움이 되는 다른 학문도 배척하지 않고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로 인해 민족적이면서도 자주적인 성격을 띠는 민족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다.
<한글 창제>
우리 나라는 오래전부터 일상생활에서 한자를 써왔기에 이두나 향찰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 고유의 문자가 없어서 우리 말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었고, 그 때문에 일상적으로 쓰는 말과 동일하면서도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쓰기 편한 문자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더욱이, 조선에서는 한자음의 혼란을 줄이며 피지배층을 도덕적으로 교화시킴으로써 양반 중심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 문자의 창제 요구가 끊임없이 있어왔다.
이러한 요구에 응답하여 세종은 1446년에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하였다. 한글은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으며, 한글을 통해 자기 의사를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었고, 글자 창제 원리가 매우 과학적인 아주 우수한 문자이다.
조선 정부는 한글을 창제한 후, 이를 보급하기 위하여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 등을 지어 한글로 간행하였다. 용비어천가는 왕실 조상의 덕을 찬양하였고, 월인천강지곡은 부처님의 덕을 기리는 서적이었다. 또한, 불경, 농서, 윤리서, 명서 등 한자로 출판된 서적들을 한글로 번역하거나 새로이 편찬하였다. 그리고 지방의 서리들이 한글을 배워 행정 실무에 활용할 수 있도록 서리의 채용 시험을 훈민정음으로 치르게 하기도 하였다.
자기 민족의 고유한 문자가 있다는 것은 민족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가장 훌륭한 도구 중 하나이다. 한글 창제 및 반포를 통해 우리 민족은 우리 고유의 문자를 가지게 되었다. 이를 통해 일반 백성들도 문자 생활을 향유할 수 있었고, 문화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도 가질 수 있었다. 그리하여 문화 기반을 탄탄하게 다지고,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교육 기관>
조선은 고려 시대의 교육 제도를 이어받았다. 그리하여 서울에 조선 최고 학부의 구실을 하는 국립 교육 기관인 성균관을 두었다. 중앙의 4학과 지방의 향교는 조선의 중등 교육 기관으로써의 역할을 하였고, 사립 교육 기관으로는 지방의 서원과 서당 등이 있었다. 이들은 계통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각각 독립된 교육 기관이었다.
성균관은 생원시,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들에 한해 입학할 수 있었으며, 중앙의 4학은 중학, 동학, 남학, 서학이 있었다. 향교는 지방에 설치된 중등 교육 기관으로, 성현에 대한 제사, 유생 교육, 지방민 교화 등을 위해 부·목·군·현에 각각 1개소씩 설립되었다. 향교에는 그 규모와 지역에 따라 중앙에서 교관인 교수 또는 훈도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한편 사립 교육 기관인 서당은 초등 교육을 담당하였는데, 4학이나 향교에 입학하지 못한 선비와 평민 자제가 그곳에서 교육받았다. 서당에서 교육받던 학생들의 연령은 대게 8~9세부터 15~16세 정도에 이러렀다.
서원의 시초는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다. 서원에서는 봄가을에 향음, 주례를 지냈으며 인재를 모아 학문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서원마다 이름이 뛰어난 선비 또는 공신을 숭배하고, 그 덕행을 추모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유생이 한자리에 모여 학문을 닦고 연구해 향촌 사회를 교화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이에 따라 국가에서는 서원의 설립을 장려하였고 그 결과 전국 각 지역에 많은 서원이 설립되었다.
<역사서의 편찬>
건국 초기부터 조선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명분을 확실하게 밝히는 동시에 성리학적 통치 규범을 확립하기 위하여 국가적 차원의 역사서 편찬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실록의 편찬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이를 국가에서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한 왕대의 역사를 후대에 남기는 실록의 편찬은 태조실록부터 철종실록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자랑할 만한 기록 문화 유산으로 평가받는다.
태조 때, 정도전은 고려 시대의 역사를 정리하고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밝힌 고려국사를 편찬하였다. 이후에도 고려 시대의 역사를 자주적인 입장에서 재정리하는 작업은 계속되었고 15세기 중엽에 기전체의 고려사 그리고 편년체의 고려사절요가 완성되었다.
우리나라 전체 역사를 담으려는 노력도 계속되었다. 이 결과 성종 때에는 동국통감이 간행되었다. 동국통감은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담은 편년체 통사로서, 서거정 등이 편찬하였다. 16세기에 새롭게 편찬된 역사서로는 박상의 동국사략 등이 있다.
<실록 편찬>
한 국왕이 죽으면, 다음 국왕 때 춘추관을 중심으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사초, 시정기 등을 종합하고 정리하여 편년체로 실록을 편찬하였다. 사초는 사관이 국왕 앞에서 기록한 내용이다. 편년체는 연대순으로 역사서를 서술하는 방식이다.
<지리서의 편찬>
조선 초기에는 중앙 집권과 국방력의 강화를 위하여 지리지와 지도를 편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태종 때에는 세계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제작하였다. 일본에 이 지도의 필사본이 현존하고 있는데, 이는 현재 남아 있는 세계 지도 가운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세종 때에는 팔도도라는 전국 지도를 만들었고, 세조 때에는 양성지 등이 동국지도를 제작하였다. 16세기에도 역시 많은 지도가 제작되었는데, 그중에서 현존하고 있는 것은 조선방역지도이다.
지도와 더불어 지리지의 편찬도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세종 때는 신찬팔도지리지 그리고 성종 때에는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군현의 연혁, 지세, 인물, 풍속, 산물, 교통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있다. 중종 때는 이를 보충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윤리, 의례서와 법전의 편찬>
조선 초기에는 유교 질서 확립을 위해 윤리와 의례에 관련된 서적의 편찬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세종 때에는 모범이 될 만한 충신, 열녀, 효자 등의 행적을 그린 그림과 글로 설명을 붙인 삼강행실도를 윤리서로 편찬하였다. 성종 때에는 국가의 여러 행사에 필요한 각종 의례를 정비한 의례서인 국조오례의가 제작되었다.
16세기에는 지방 사림이 향촌 사회에 소학과 주자가례를 보급하려 힘썼다. 이를 위해 연장자와 연소자, 친구 사이에서 지켜야 할 윤리를 강조한 책인 이륜행실도와 어린이가 지켜야 할 예절을 기록한 윤리서인 동몽수지 등을 간행하고 보급하였다.
한편 조선은 유교적 통치 규범을 명문화하기 위해 법전의 편찬에 힘썼다. 건국 초기에 정도전은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을 편찬하였고, 조준은 경제육전을 편찬하였다.
세조 때부터 편찬되기 시작한 경국대전은 성종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다. 경국대전은 이전,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의 6전으로 구성된 조선의 기본 법전으로, 조선 후기까지 법률 체계의 골격이 되었다. 이 법전의 편찬은 조선 초기에 정비된 유교적 통치 질서와 문물 제도가 완비되었음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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