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근세의 정치 - 근세 사회의 성립

by 밍밍S2 2023. 1. 25.
반응형

근세 사회의 성립

<조선의 건국>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 군사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본격적인 개혁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신진 사대부 사이에서는 개혁을 어떻게 진행할 것이냐를 두고 두 갈래의 의견이 대립하였다. 이색, 정몽주처럼 신진 사대부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온건 개혁파는 고려 왕조의 틀은 그대로 두고 그 안에서 점진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는 방안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고려 후기 비리의 핵심 세력이었던 권문세족을 제거하고 그들의 대토지 사유는 정비하되, 왕조 질서는 그대로 두고 전면적인 토지 개혁은 반대하였다. 하지만 정도전 등의 소수 급진 개혁파는 고려 왕조 자체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역성혁명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전면적인 토지 개혁을 통해 권세가에 의한 토지 사유를 축소하려 하였다.


  급진 개혁파는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옹립하면서 정치 실권을 장악했다. 이 세력은 역성혁명을 반대했던 정몽주 등의 온건 개혁파를 피로써 제거하였다. 이를 통해 이성계는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고, 마침내 1392년에 조선을 건국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국방 및 교통의 중심이었던 한양으로 수도(도읍)를 옮기고, 도성을 쌓았으며 경복궁을 지었다. 경복궁과 더불어 궁궐, 종묘, 사직, 관아, 학교, 시장, 도로 등 기반 시설들을 건설하여 도읍의 기틀을 닦았다. 좌묘우사라는 표현이 있다시피 종묘는 왕실의 사당으로 왼쪽에 위치하며 사직은 국토신, 곡식신 등을 모시는 사당으로 오른쪽에 위치한다.

 


  초창기 조선 건국 이후 문물제도를 정비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바로 삼봉 정도전이다. 그는 급진 개혁파의 우두머리로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으며, 민본적 통치 규범을 마련하였고 재상 중심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유교 국가를 건설하고 싶었던 그는 훌륭한 재상을 선택하여, 재상에게 정치의 실권을 부여해 위로는 왕을 올바르게 인도하고 아래로는 신하들을 통괄하며 만민을 다스리는 중책을 부여하는 의정부 서사제를 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또한 불씨잡변을 집필하여 불교를 비판하고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확립했다. 다양한  문물 제도를 갖추는 데 크게 공헌한 사람은 정도전이었다. 그는 민본적 통치 규범을 마련하고, 재상 중심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또, 불씨잡변을 통하여 불교를 비판하였으며,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이 발발하였다. 이를 통해 개국 공신 세력들이 제거되고 새롭게 왕위에 오르게 된 태종은 재위 기간 내내 왕권 강화를 위해 힘썼다.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 정비를 위해 6조(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에서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바로 국왕에게 사안을 올려 결재를 받아 시행하는 6조 직계제를 선택했으며, 언론 기관인 사간원을 독립시켰고 이를 통해 지나치게 권한을 갖는 대신들을 견제하였다. 또한 양전 사업 및 호구 파악을 위해 노력을 기울여 호패법을 실시했고, 사원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몰수했으며, 억울한 노비를 조사해 해방했다. 또한 왕자의 난에서 문제가 된 사병들을 혁파했고 왕만이 군사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여 친위 군사를 늘리고 왕권 강화에 힘을 썼다.

 

<유교 정치의 실현과 문물 제도의 정비>

  태종의 강력한 왕권 강화 정책 이후에 왕위에 오른 세종은 안정된 왕권 및 경제력을 기반으로 삼아 유교 정치를 펼쳤다. 학문 군주였던 세종답게 궁궐 안에 정책을 연구하는 기관으로 집현전을 설립하여 집현전 학사들을 일반 관리보다 우대하였다. 집현전의 학사들은 학문 연구 뿐만 아니라 왕의 수업이라고 불리는 경연에도 참여하여 국왕의 통치에 관한 자문을 하는 역할도 하였다. 그리고 6조에서 올라오는 모든 일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들이 중심이 되는 의정부에서 먼저 논의를 한 다음, 합의된 사항들을 국왕에게 올려 결재를 받는 의정부 서사제를 채택하여 왕의 권한 중 일부를 의정부에 넘겨주었다. 이를 통해 훌륭한 재상들이 정계에 많이 등용되었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제도와 같이 국가 안보에 관련된 중요한 일들은 세종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비로소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안정된 왕권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교 정치를 실현하였다.

 

먼저, 궁중 안에 정책 연구 기관으로 집현전을 두고 집현전 학사를 일반 관리보다 우대하였다. 뒤이어 의정부에서 정책을 심의하는 의정부 서사제로 정치 체제를 바꿔 왕의 권한을 의정부에 많이 넘겨주고, 훌륭한 재상들을 등용하여 정치를 맡기고자 하였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세종은 아울러 국가 행사를 거행할 때 오례에 따른 유교식으로 진행했으며, 왕실이 아닌 일반 사대부에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독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의 전반적인 윤리로 자리 잡게 하였다. 이처럼 세종은 왕도 정치를 바탕으로 유교적 민본 사상을 실현하려 하였다. 유능한 인재 발굴뿐만 아니라 청백한 재상들을 정치에 등용하여 깨끗하고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는 정치를 실현했다.

 

  세종의 왕위를 이어받은 문종이 일찍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어린 아들인 단종이 즉위하면서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어린 왕을 보필하던 김종서, 황보인과 같은 재상들에게 정치적인 실권이 넘어가자, 세종의 아들이었던 수양대군은 정변을 일으켜 단종을 폐위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계유정난). 정변을 통해 왕이 된 세조는 자신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지기 위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의정부 서사제에서 다시 6조 직계제로 통치 체제를 정비했으며, 자신을 견제하던 집현전도 폐지하였다. 그리고 경연을 열지 않아 신하들의 조언도 받지 않았으며 태종 이후 정치적인 참여를 제한했던 종친들도 등용하기 시작했다.

 

  다시 강력하고 안정된 왕권을 기반에 두고 즉위한 성종은 조선 건국 이후의 문물제도 정비를 완비하였다. 조선의 기본 통치 방향과 이념을 담은 조선의 통치 규범인 경국대전 편찬을 마무리하여 반포하였다. 이를 통해 비로소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세조가 폐지했던 집현전을 계승한 홍문관을 둠으로써 관원 모두가 경연관을 겸하게 해 정승을 비롯한 주요 관리들도 경연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즉, 경연은 단순하게 왕의 학문을 연마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왕과 신하가 함께 모여서 정책을 토론하고 심의하는 자리가 되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