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치 체제의 정비
<관리 등용 제도>
조선 시대에는 주로 과거나 음서, 천거 등을 통하여 관리를 선발하였다. 과거의 종류로는 문관을 선발하는 문과와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 그리고 기술관을 선발하는 잡과가 있었다. 문과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식년시와 비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증광시, 알성시 등이 있었다. 문과의 식년시 같은 경우엔 각 도의 인구 비례에 따라 합격자를 선발하는 초시, 초시 합격자들 중에서 33명을 선발하는 2차 시험인 복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왕의 주관하에 실시하는 전시를 통해 순위를 결정지었다.
천인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제한 없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지만, 탐관오리의 아들, 재가한 여자의 아들과 손자, 그리고 서얼은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다. 문과(대과)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비 시험인 소과(생원시, 진사시)에 합격하여 생원이나 진사가 되어야 했지만, 나중에는 크게 제한을 두지 않았다. 소과 합격자인 생원과 진사는 성균관에 입학하거나 문과(대과)에 응시할 수 있었으며, 하급 관리가 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하기도 하였다.
무과도 문과와 절차는 동일하지만, 최종 선발 인원은 28명으로 더 적었다. 그리고 기술관을 뽑는 잡과 역시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실시되는데, 분야별로 정원이 정해져 있었다.
과거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관직에 등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고위 관리의 추천을 받아 간단한 시험을 치른 후 관직에 등용되는 경우도 있었고, 음서를 통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천거는 대부분 기존 관리를 대상으로 하였기에 벼슬을 하지 않은 사람이 천거되어 관직에 등용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음서의 혜택을 받는 대상도 고려 시대에 비하여 크게 줄어들었고, 설령 음서 출신이 등용되더라도 다음에 문과에 응시하여 합격하지 않으면 고위 관직으로 승진하기도 어려웠다.
관직 제도가 정비되고 지배층이 증가하면서 조선시대의 인사 관리 제도 역시 새롭게 정비되었다. 가까운 친인척과 같은 관서에 발령이 나지 않도록 하고, 출신 지역의 지방관으로 임명하지 않는 상피제를 마련하여 권력의 집중과 부정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고, 공정한 인사 제도 운영을 위하여 5품 이하의 관리를 등용할 경우 서경을 필수 절차로 하였다. 서경이란 사간원과 사헌부, 이른바 양사에서 관리 임용을 검토하는 단계를 말한다. 아울러 고급 관리가 하급 관리의 근무 성적을 평가했고 이는 승진 또는 좌천에 반영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조선은 합리적이고 공정한 인사 행정을 위한 제도를 갖추었고 관료제적 성격이 더욱 뚜렷해졌다.
사림의 대두와 붕당 정치
<사림의 정치적 성장>
세조가 집권한 이후 공신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하고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들을 훈구 세력이라 부른다. 이들은 조선 초기에 신진 사대부로부터 관학파의 학풍을 계승하여 나라의 문물 제도를 정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편 지방, 특히 영남과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지주 배경을 가지고 성리학에 투철한 지방 사족들이 15세기 중반 이후 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를 사림이라 부른다. 이들은 성리학적인 관념을 중시해 향약과 가묘를 중시했고,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가져 기자를 중시했다. 또한 훈구 세력이 중앙 집권적인 체제를 중요하게 여긴 것에 비해 이들은 향촌 자치를 주장하며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강조하였다.
향촌 사회를 바탕으로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던 사림들은 성종 대에 김종직과 그 문인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하고 훈구 세력을 견제하며 권력에 참여했다.
과거를 통하여 중앙 정계 진출에 성공한 사림 세력은 주로 이조전랑과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며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해 훈구 세력의 일방적인 정치적 독주를 견제하였다. 성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림 세력을 중용하였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이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두 세력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기보다 두 세력을 모두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특히, 사림 세력들의 활발한 언론 활동을 억압하였다. 그러면서 연산군 시기에 발생한 두 차례의 사화(무오사화, 갑자사화)를 겪으면서 영남권 사림들의 대부분이 몰락하였다. 이후 연산군은 언론을 극도로 탄압하고 재정을 낭비하는 등의 폭력적인 정치로 인해 중종반정으로 쫓겨났다(1506).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정계에서 사라졌던 사림을 다시 등용하여 유교 정치를 부흥하고자 하였다. 당시 사림 중에서도 명망이 높았던 조광조를 중용하였고, 천거제의 일종인 현량과를 실시해 사림이 대거 등용되었다. 이들은 전처럼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언론을 활용해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 내세우며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조광조를 비롯한 당시의 사림은 경연을 강화하고, 언론 활동을 활성화하며 위장 공신들의 위훈을 삭제하고 소격서를 폐지하고자 하였으며, 소학을 보급하고 방납의 폐단을 시정하는 등의 주요 정책을 내세우며 개혁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에 대한 공신들의 반발로 조광조와 사림들은 대부분 제거되었다(기묘사화).
기묘사화 이후 중종은 훈구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등용하고자 노력했지만, 중종이 죽은 후 명종이 즉위하면서 외척 간의 권력 다툼에 휩쓸려 또 한 번 사림 세력은 정계에서 제거되었다(을사사화). 하지만 사림 세력은 서원과 향약을 바탕으로 향촌 사회에서 꾸준히 그 영향력과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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