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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근세의 정치 - 양 난의 극복

by 밍밍S2 2023.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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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난의 극복

<왜군의 침략>

  15세기 일본과의 관계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것에 비해 16세기에는 일본과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일본인의 무역 요구는 거세졌던 것에 반에 조선 정부의 통제는 점차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3포 왜란과 을묘왜변이 중종과 명종 대에 일어났다. 3포를 개항한 이후, 특히 명종 10년에 왜인이 7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전라남도 연안을 습격한 사건을 을묘왜변이라 하는데 이후 일본과의 교류는 일시적으로 단절됐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비변사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하게 했으며 일본에 사신을 보내 정세를 살펴보는 등의 노력을 하였다.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뒤였는데,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를 한 후 20만 대군을 이끌고 1592년에 조선을 침공했고 이를 임진왜란이라 한다. 미처 전쟁을 대비하지 못했던 조선 정부는 전쟁 초기에 속수무책으로 왜군에게 당했고, 급기야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여 명에 원군을 요청했다.

 

<수군과 의병의 승리>

  왜군은 수륙병진 작전을 펼쳤는데, 육군은 북상하고 수군이 남해와 서해를 돌아 육군에 물자를 조달하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전라도 지역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은 옥포해전에서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다음 남해안 여러 곳에서 연속적으로 승리를 거둬 남해안의 재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를 통해 곡창 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지킬 수 있었으며, 왜군의 수륙병진작전을 좌절시킬 수 있었다.

 

  한편, 육지에서는 정규군이 아닌 자발적으로 조직된 의병이 활동하였다. 이들은 향토 지리에 밝은 점을 활용하고, 또 그에 맞는 전술을 구사하여 적은 병력이었지만 왜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의병은 주로 농민이 주축을 이루었고, 퇴직한 관리, 지방 사림 양반 그리고 승려가 조직하고 지도하였다. 산발적으로 활동하던 의병 부대들은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상당수가 관군에게 편입되어 조직화되었고, 이는 관군의 전투 능력 향상에 영향을 끼쳤다.

 

<전란의 극복과 영향>

  전쟁 초기에는 조선이 굉장한 수세에 몰렸지만, 수군과 의병의 승전으로 반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더불어 명나라의 원군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고, 관군과 백성이 힘을 합쳐 행주산성 등에서 왜군의 대규모 공격을 방어했다.

 

  이후 명나라와 경상도 해안 일대로 밀려난 왜군이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 동안 조선 역시 전열을 정비해 왜군의 완전 섬멸을 준비했다. 3수병 직업군인 체계인 훈련도감을 설치해 군대의 편제 및 훈련 방법을 바꾸었고, 속오법을 통해 지방군 편제도 개편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화포를 개량하고 조총을 제작해 무기에서의 약점을 보완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휴전 회담이 3년 만에 결렬되자, 왜군은 1597년에 조선을 다시 침략해 왔고 이를 정유재란이라 부른다. 하지만 조·명 연합군이 직산에서 왜군을 격퇴했고 이순신이 명량에서 왜군의 군함을 격파하자 왜군은 다시 남해안 일대로 후퇴했고, 본토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군대를 철수하였다.

 

  임진왜란은 조선 내외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국내적으로는 수많은 인명피해를 낳았을 뿐 아니라, 기근 및 질병으로 인구가 매우 감소하였다. 토지 대장과 호적의 상실로 국가 재정이 궁핍해졌으며 식량도 부족해졌다. 또한, 왜군의 방화와 약탈로 불국사, 서적, 실록 등 수많은 문화재 역시 손실되었고, 수만 명의 포로가 일본으로 끌려갔다.

 

  일본은 우수한 인쇄공과 이삼평을 비롯한 도자기 기술자 그리고 성리학자를 포로로 데려갔으며 활자, 그림, 서적 등을 약탈했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일컬을 만큼 도자기 기술자들이 일본의 도자기 문화 발달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를 통해 일본은 자국의 문화뿐만 아니라 성리학과 도자기 문화 발달을 위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조선과 명이 일본과 싸우는 혼란한 틈을 타서 북방의 여진족이 급속도로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했고 이는 동아시아 정세가 크게 변화하는 데 기여했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시기에, 조선과 명의 힘이 약화한 틈을 타 압록강 북방의 여진족이 1616년에 후금을 건국하였다. 이후 계속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했고 후금은 명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은 후금을 공격하는 동시에 조선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전쟁의 뒷수습에 한창이던 광해군은 신중한 중립 외교를 통해 명과 후금 사이에서 대처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와줬던 명의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었지만,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는 후금과 적대적인 관계를 맺는 것도 위험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임명하고 1만 3000명의 군대를 파견해 명을 지원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말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할 것을 명하였다. 결국 조·명 연합군은 후금에 패하였고, 강홍립 역시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후에도 명이 꾸준하게 원군을 요청했지만, 광해군은 이를 적절하게 거절하는 동시에 후금과 친선 관계를 꾀하는 중립 외교를 펼쳤다.

 

<호란과 북벌 운동>

  하지만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명분과 실리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서인에 의해 강력하게 비판받았고 서인은 인조반정을 추진하여 광해군을 폐하고 인조를 옹립하였다. 인조의 즉위와 함께 정권을 잡은 서인은 친명 배금 정책을 펼치며 후금의 심기를 건드렸다.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을 침략했고 이를 정묘호란이라고 한다. 정봉수의 의병은 용골 산성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고, 이립 등의 의병은 관군과 합세하여 후금에 맞서 싸웠다. 후금은 보급로가 끊기자 강화를 제의하였고 형제의 관계를 맺고 군대를 철수했다.

 

  이후 후금은 세력을 더욱 확장하였고 국호를 청이라 고쳤으며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며 대군을 이끌고 병자년에 침입해왔다. 이를 병자호란이라 부른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청군에 맞섰지만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여태껏 조선에 조공을 바치고, 조선 역시 오랑캐라고 생각했던 여진족이 건국한 나라에 거꾸로 군신 관계를 맺었으며, 임금이 굴욕적으로 항복했다는 소식은 조선인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후 오랑캐에 당한 수모를 갚고,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줬던 명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북벌 운동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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