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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근세의 정치 - 사림의 대두와 붕당정치(2),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by 밍밍S2 2023.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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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의 대두와 붕당정치

<붕당의 출현>

  마침내 선조가 즉위하면서 그동안 향촌 사회에 숨어 세력을 확장해오던 사림 세력이 대거 중앙으로 진출하면서 정치 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 세력은 이전의 척신 정치의 잔재를 어떻게 청산하느냐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게 되었다. 명종 때 이후부터 정권에 참여했던 기성 사림은 척신 정치를 과감하게 개혁하는 것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던 반면에 새롭게 정권에 차명하게 된 신진 사림은 철저하게 원칙을 지켜 척신 정치를 청산해 사림 정치의 실현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두 세력의 갈등은 심화되었고 기성 사림을 중심으로 서인이 형성되었으며 신진 사림을 중심으로 동인이 형성되었다. 이황과 조식, 서경덕의 학문을 이어받은 동인은 다수의 신진 사림 세력이 참여하여 먼저 붕당의 형태를 이루었던 반면에, 이이와 성혼의 문인이 가담한 후에 서인이라는 붕당의 모습이 갖춰졌다.

 

  이후 붕당은 정치적인 이념과 학문적 성향에 따라 결집되었기에 정파적 성격과 학파적 성격을 동시에 가진 집단이 되었다.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명과 관계>

  조선은 사대교린을 외교 정책으로 삼았고 이를 일관되게 추진하였다. 사대교린 정책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 안에서 나타난 외교 정책으로 조공 관계로 맺어졌지만 서로의 독립성이 인정된 상태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예속 관계에 의한 외교는 아니다. 태조 때에는 정도전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요동 정벌의 준비 과정과 여진과의 관계를 둘러싸고 명과 분편한 관계가 유지되기도 했다. 하지만 태종 이후에는 양국 간의 관계가 좋아지면서 활발한 교류도 이루어졌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명에 대해 사대적인 정책을 유지하였지만 명은 조선에 대해 구제척으로 내정을 간섭하지는 않았다. 매년 정기적, 부정기적으로 사신단을 교환하였고 이때 문화적, 경제적인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명에 대한 이러한 사대 외교는 왕권을 안정화하고 국제적인 지위를 확보하려는 자주적이고 실리적인 외교였으며, 명의 선진화된 문물을 흡수하는 문화 외교인 동시에 공무역의 성격을 띠고 있다.

 

 

<여진과 관계>

  조선은 영토 확보 및 국경 지방의 안정을 위해 여진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먼저 태조 때에 일찍부터 두만강 지역이 개척되었다. 이후 세종 때에는 4군 6진을 설치하여 압록강에서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의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이후 여진에 대해 조선은 회유와 토벌 두 가지 양면적인 정책을 취했다. 많은 여진족의 귀순을 독려하기 위해 관직을 주거나 정착을 위한 토지 및 집을 주어 우리 주민으로 동화시키고, 사절단의 왕래를 통한 무역을 허용했으며 국경 지방인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설치하고 국경 무역을 허가했다. 한편 이런 교린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진족은 자주 국경을 침범하고 약탈을 일삼았기에 조선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들을 정벌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 정부는 삼남 지방에 거주하는 일부 주민들을 북방 지역으로 이주시켜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 지역을 개발하는 사민 정책을 펼쳤고, 그 지역 토착민을 토관으로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했다.

 

<일본 및 동남 아시아와 관계>

  조선은 여진뿐만 아니라 일본 및 동남 아시아 국가들과의 교류에서도 기본적으로 교린 정책을 펼쳤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지속된 왜구의 침략으로 피해가 심해지자 조선은 수군을 강화했고, 뛰어난 성능의 전함을 많이 건조하였다. 특히 화약 무기 개발에 힘을 쏟아 선박에 장착해 왜구 격퇴에 사용했다.

 

  이렇게 조선이 강력하게 왜구의 침략에 맞서자 약탈이 힘들어진 왜구들은 평화적 무역 관계를 맺기를 요구했다. 조선 정부는 일부 항구를 개방하고 제한된 무역을 가능하게 했지만, 이후에도 왜구들의 침략이 계속되자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토벌하여 강력하게 응징하였다. 참고로 쓰시마 섬에 대한 토벌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이루어졌다. 1419년 이종무는 병선 227척과 병사 1만 7000여 명을 이끌고 쓰시마 섬을 토벌하여 왜구 근절을 약속받았다. 이와 더불어 왜구의 요구를 받아주어 부산포, 제포(진해), 염포(울산) 등 3개의 포를 개방하여 무역을 허용했고 이 안에서의 제한된 교역 또한 허락하였다.

 

  또 조선 초기에는 류큐, 시암, 자와(자바) 등의 여러 동남 아시아권 나라들과도 교류하였다. 이 나라들은 조공 또는 진상과 같은 형식의 기호품 부류의 각종 토산품을 조선에 가져와서 옷, 옷감, 문방구 등의 회사품으로 교환하여 가져갔다. 특히, 류큐와 활발하게 교역했는데, 불경, 유교 경전, 범종, 부채 등을 류큐에 전해주어 이 지역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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