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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근·현대의 정치 - 개화와 주권 수호 운동(1)

by 밍밍S2 2023.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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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와 주권 수호 운동

<흥선 대원군의 정책>

  19세기 중엽의 조선 사회는, 내적으로 세도 정치에 저항하는 민중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으며, 외적으로는 일본과 서양 열강이 침략해 오고 있었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흥선 대원군은 조선 왕조의 위기를 극복하고 실추된 왕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 경복궁 중건, 비변사 폐지,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 회복, 대전회통 편찬 등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다. 또한, 붕당의 근거지로 인식되었던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철폐하였으며, 농민 봉기의 원인으로 지목된 삼정을 해결하여 국가 재정 확충 및 민생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1866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의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전국에 척화비를 건립하였다. 척화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척화비를 근거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강하게 유지하였다. 이러한 흥선 대원군의 대외 정책은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데에는 성공적이었지만, 조선의 문호 개방을 늦추는 부작용도 낳았다.

 

<개항과 개화 정책>

  1873년에 흥선 대원군이 정권에서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펼치면서 민씨 세력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개항과 통상 무역을 주장하는 집단이 정치적으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일본은 조선 침략을 노리며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처음으로 나라의 문을 열었다(1876). 강화도 조약의 정식 명칭은 조·일 수호 조규이고, 병자 수호 조약이라고도 한다. 이 조약에 이어 일본 상품에 대한 무관세, 조선 양곡의 무제한 유출 등을 규정한 통상 장정도 맺었다. 강화도 조약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지만, 부산 및 다른 두 곳을 개항해야 했으며, 일본에 치외법권 및 해양 측량권 등을 내어 준 점에서 불평등 조약이라 할 수 있다.

 

  강화도 조약 이후로 조선 정부는 1882년 미국과 조약을 맺은 후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양 열강과 차례로 외교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조약 역시 치외법권과 통상, 항해 조약 등에서 한 나라가 가장 유리한 대우를 상대국에도 부여하는 최혜국 대우를 규정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개항 이후, 청과 일본이 조선을 두고 침략 경쟁을 벌이는 와중에 조선 정부는 자체적으로 부국강병을 목표로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정부는 이 정책의 전담 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으며, 일본, 청 그리고 미국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신식 문물을 습득하게 하였다.

 

  한편 이러한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에 전통적인 유생층은 성리학적 전통 질서 유지 및 외세 배척을 내세우며 반대하는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위정척사 운동은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배척하자는 운동이었다. 이들은 개항과 개화 반대 상소를 올려 정부 정책에 반발하였다.

 

  개화 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소외되고 피해를 당한 구식 군인, 하층민 등이 주도하여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임오군란 진압을 위해 민씨 세력은 청에 원병을 요청하였으며, 서울에 들어온 청의 군대는 임오군란으로 일시 집권한 흥선 대원군을 청으로 잡아갔다. 

 

<갑신정변>

  임오군란 이후, 조선 내정에 대한 청나라의 간섭 그리고 경제적 침략은 강화되었다. 이에 반발한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적 개화 세력은 일본의 군사 지원을 받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1884).

 

  급진 개화파는 청과의 의례적 사대 관계 폐지, 입헌 군주제적 정치 구조 지향, 인민 평등권 그리고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등을 주장하였다. 또, 지조법 실시, 호조로 재정 일원화, 보부상 보호를 위하여 설치한 기관인 혜상공국 폐지 등을 주장하며 자유로운 상업 발전을 추구하였다. 지조법은 토지에 부과하는 세금을 생산량 기준이 아닌 토지 가격에 따라 부과하는 방식이다. 기존에 폐해가 심했던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일본에서 실시된 내용을 수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개화파 정권은 청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무너졌다. 이는 갑신정변 추진 세력의 정치·군사적 기반이 약했고, 민중의 지지 속에서 정변을 일으키기보다 외세에 의존하는 방법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근대 국민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최초의 정치 개혁 운동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갑신정변 이후, 조선 정부는 청의 과도한 내정 간섭을 타파하기 위해 러시아와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에 위기감을 느낀 영국은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였다(1885). 조선에 대한 열강의 침략이 점점 격화되자, 조선 주재 독일 외교관 부들러와 개화파 지식인 유길준 등은 조선을 중립국으로 하자는 논의를 구상하기도 하였다.

 

● 갑신정변 때의 14개 조 정령의 일부

1. 청에 잡혀간 흥선 대원군을 돌아오게 하며, 종래에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3. 지조법을 개혁해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

6. 각 도의 환자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

9. 혜상공국을 혁파한다.

12.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합한다.

13.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14. 의정부, 6조 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을 없앤다.

<갑신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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