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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근·현대의 정치 - 개화와 주권 수호 운동(3)

by 밍밍S2 2023.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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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와 주권 수호 운동

<일제의 국권 침탈>

  일본은 제1차 영·일 동맹(1902)을 체결하여 국제적 입지를 강화한 후, 본격적으로 한반도 지배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1904년 러시아를 선제공격하여 러·일 전쟁을 일으켰다. 대한 제국은 국외중립을 선언하였지만,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강제로 한·일 의정서를 체결하여 정치적 간섭과 군사적 점령을 꾀하였다. 그리고 바로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하여 외고, 재정 등 각 분야에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을 두고 한국 내정을 간섭하였다.

 

  일제는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 영국과 제2차 영·일 동맹을 맺고 나서,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러시아와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고 국제 사회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그리고 1905년에 일방적으로 을사늑약을 발표하여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대한 제국을 보호국으로 지정하였다.

 

  을사늑약은 제2차 한·일 협약이라고도 한다. 일본의 무력적인 강압 속에서 이에 동조한 을사 5적이 찬성하여 체결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조약의 체결 과정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고, 고종도 끝까지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식적인 조약으로 성립될 수 없었다.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던 고종이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자, 일제는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그리고 1907년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 정부의 각 부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여 내정을 장악하였고, 군대마저 해산시켜 실질적으로 한국을 지배하였다. 이후 전국의 의병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사법권과 경찰권을 빼앗은 다음 마침내 1910년 대한 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한편, 일제는 러·일 전쟁 중 울릉도의 부속 섬이었던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이는 당시 대한 제국 국권을 강탈했던 일제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독도는 역사적 사실으로나 국제법상으로나 대한 제국을 계승한 우리의 영토이다.

 

  또한, 일제는 청에서 안봉선 철도 부설권을 받는 대가로 간도 지방에 대한 관리 권한을 넘겨주었다. 19세기에 조선과 청 사이에 토문강의 위치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논란이 있었는데, 결국 간도는 우리의 외교권이 불법적으로 상실된 상태에서 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간도 협약(1909)에 따라 청의 영토로 귀속되고 말았다. 간도 협약에 따라 일제는 간도를 청의 영토로 인정해 주었다. 하지만 최근 토문강과 두만강이 별개의 강이라는 각종 자료가 발굴됨에 따라 간도 귀속 문제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 간도 협약

제1조 일·청 두 나라 정부는 토문강을 청국과 한국의 국경으로 하고, 강 원천지가 있는 정계비를 기점으로 하여 석을수를 두 나라의 경계로 한다.

제3조 청 정부는 이전과 같이 토문강 이북의 개간지에 한국 국민이 거주하는 것을 승인한다. 그 지역의 경계는 별도로 표시한다.

제5조 토문강 이북의 한국인과 청국인이 함께 살고 있는 구역 안에 있는 한국 국민 소유의 토지와 가옥은 청 정부가 청 국민의 재산과 똑같이 보호해야 한다.

제6조 청 정부는 앞으로 길장 철도를 연길 이남으로 연장하여 한국의 회령에서 한국의 철도와 연결할 수 있다.

<순종실록, 1909. 9. 4.>

 

<항일 의병과 애국 계몽 운동>

  조선 내부의 각계각층에서는 일제의 주권 침탈에 대해 일제와 을사 5적을 규탄하고, 조약 폐기를 위해 다양한 형태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안중근은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사살하였고, 장인환과 전명훈은 외교 고문이었던 스티븐슨을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하였다. 

 

  의병 전쟁도 을사늑약을 계기로 확산하였다. 이때, 민종식, 최익현 등의 양반 출신 의병장을 비롯하여, 신돌석이라는 평민 출신의 의병장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고종의 강제 퇴위 그리고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의 항쟁은 한층 고양되었다. 해산된 군인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 전투력이 강화되었고, 활동 영역도 간도와 연해주 등 국외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정규 일본군의 화력에 비해 열세였고, 의병을 주도하던 양반 유생층 그리고 평민 의병장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병은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13도 창의군을 결성하고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했지만 실패에 그치고 말았다(1908). 이를 계기로 의병은 소규모 유격전을 전개하였으며, 그중 일부는 만주와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겨 독립군이 되었다.

 

  의병 전쟁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한 대표적인 구국 운동으로, 민족의 강인한 저항 정신을 표출하고 국권 회복을 위한 무장 투쟁을 전개하여 일제 시대에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의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한편, 여러 종류의 사회단체들이 설립되어 구국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보안회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좌절시켰고, 입헌 정치 체제 수립을 목적으로 설립된 헌정 연구회의 활동도 두드러졌다. 을사늑약 이후에는 대한 자강회, 대한 협회, 신민회 등의 단체들이 설립되어 국권 회복을 위한 계몽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 중 신민회는 국권 회복과 공화 정치 체제의 국민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비밀 조직이었다. 신민회는 초기에 국내에서 문화적, 경제적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점차 국외에서 독립군 기지 건설과 같은 군사적 실력 양성을 꾀하였다. 하지만 1911년, 일제가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한 배일 기독교 세력과 신민회의 항일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조작하여 수백 명의 민족 지도자를 투옥하고, 중심인물 105인을 재판에 회부한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는 해체되었다.

 

  이러한 애국 계몽 운동은 일제에 의해 정치·군사적으로 예속된 상태에서 전개되어 항일 투쟁의 결과적 측면에서는 한계가 있었지만, 민족 독립운동의 이념과 전략을 제시하고, 장기적인 민족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았다는 점에서는 큰 의의가 있다.

 

● 대한 자강회 취지서

  무릇 우리나라의 독립은 오직 자강의 여하에 있을 따름이다. 우리 대한이 종전에 자강의 방법을 강구하지 않아 인민이 스스로 우매함에 묶여 있고 국력이 쇠퇴하여 마침내 오늘의 위기에 다다라, 결국 외국인의 보호를 당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자강의 도에 뜻을 다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 자강의 방법을 생각해 보면, 다름 아니라 교육을 진작함과 식산흥업에 있다. 무릇 교육이 일어나지 못하면 백성의 지혜가 열리지 못하고, 산업이 늘지 못하면 국부가 증가하지 못한다.

<대한 자강회 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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