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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근·현대의 정치 - 민족의 수난과 항일 민족 운동(2)

by 밍밍S2 2023.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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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수난과 항일 민족 운동

<대한민국 임시 정부>

 3·1 운동을 계기로 우리 민족은 정부를 수립하여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효과적으로 국민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서울과 연해주, 상하이에 각각 정부가 조직되었고, 1919년 9월, 세 정부를 통합하여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헌법을 갖추었으며, 민주 공화제와 대통령제를 채택하였다. 임시 정부는 입법 기관인 임시 의정원, 사법 기관인 법원, 행정 기관인 국무원을 설치하여 삼권 분립의 헌정 체제를 만들었다.

 

  초기의 임시 정부는 갖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의 민족 독립운동을 효과적이고 조직적으로 추진하는 중추 기관의 역할과 임무를 담당하였다. 또한, 독립운동 자금 모금과 정보 수집을 위해 연통제와 통신 기관으로 정보의 수집, 분석, 교환, 연락 등의 업무를 관장하던 교통국 등을 활용하였다. 연통제는 임시 정부가 국내의 독립운동을 연결하기 위해 설치한 비밀 연락 조직으로, 정부 문서와 명령 전달, 군자금 송부, 정보 보고 등의 업무를 맡았다.

 

  임시 정부는 또한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로 파견하여 독립을 주장하기도 하였고, 미국에 구미 위원부를 설치하여 이승만을 중심으로 외교 활동을 전개하게 하는 등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적으로 여론화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애국 공채를 발행하고, 독립신문이라는 기관지를 간행하고 배포하였으며, 사료 편찬소를 설치하여 한·일 관계 사료집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표방하였으며, 우리 민족의 주권을 대표하는 정부로 기능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통할하는 중심 기구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국내외 항일 민족 운동>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경제 발전 및 교육 진흥을 통한 실력 양성을 목표로 문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일제는 친일파를 양성하는 한편, 민족주의 세력을 회유하여 민족 운동을 약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주의 진영은 자치 운동 문제를 놓고 타협적인 세력과 비타협적인 세력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한편, 1920년대에는 사회주의 운동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927년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이 연합하여 신간회를 조직하였다. 신간회는 자치론의 확산을 우려했던 비타협적 민족주의 인사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민족 협동 전선으로 조직한 것이었다. 이들은 1) 정치적, 경제적 각성 촉진, 2) 공고한 단결, 3) 기회주의 일체 부인과 같은 강령을 세우고 여러 지방을 순회하면서 강연회를 열었다. 여기서 신간회는 조선인에 대한 착취 기관 철폐, 기회주의 배격, 조선인 본위의 교육 제도 실시 그리고 생활 개선 등을 주장하였으며, 노동 쟁의나 소작 쟁의, 동맹 휴학 등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학생들 역시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민중 계몽 활동과 일제의 교육적 차별에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들은 주로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개별적인 활동을 해나갔으며 1926년에는 민족 운동 세력과 연결되어 6·10 만세 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1929년 광주에서는 한·일 학생 간의 충돌 사건을 계기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하여 3·1 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애국지사들은 국권을 빼앗긴 후 간도와 연해주 지방에 집단 거주지를 개척하였다. 이들은 그곳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항일 독립 전쟁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먼저 각 지역 산업을 부흥시켜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고, 청소년에게 민족 교육 및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무장 독립 전쟁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3·1 운동 이후 만주와 연해주 부근에서 많은 독립군 부대가 조직되었다. 이들 독립군 부대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의 일제 식민 통치 기관을 습격하고 파괴하기도 하였으며 일본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1920년에는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과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군 등이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1920년 독립군에 패한 일본군이 간도 일대에서 동포 1만여 명 학살하고 민가 2500여 채와 학교 30여 개소를 불태웠으며(간도 참변), 독립군을 토벌하려 하였다. 이에, 독립군 부대들은 연해주의 자유시로 근거지를 옮겼지만, 적색군에 의해 무장 해제당하는 자유시 참변을 당하였다. 이후 독립군 부대는 다시 만주로 이동하여 각 단체의 통합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로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를 조직하였으며, 이 중 참의부는 임시 정부의 직할 기관이었다. 3부는 기본적으로 재만 동포의 자치 기구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자체 무장 독립군을 편성하여 국경을 넘나들며 일제와 치열한 군사 전투를 벌였다.

 

  1930년대에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중 다수는 한국 독립군과 조선 혁명군으로 재편되었다. 이들은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에 중국군과 연합하여 다수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렇게 항일 무장 투쟁이 전개되는 와중에 의거를 통해 민족의 독립 의지를 고취하고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려 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개별적으로 활동하거나, 의열단 또는 한인 애국단에 속하여 활동하면서 식민 통치 기관 파괴, 일본인 고관 및 친일 인사 처단 등의 의거 활동을 펼쳤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1919년 사이토 총독에 폭탄을 투척한 강우규, 1921년 조선 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한 김익상, 1923년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김상옥, 1926년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나석주, 1932년 도쿄에서 일본 국왕에 폭탄을 투척한 이봉창 그리고 같은 해 상하이 홍커우 공원 일본 전승 축하식에서 폭탄을 투척한 윤봉길 등이 있다.

 

  1937년 일제가 중·일 전쟁을 일으키고 중국 본토를 위협하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흩어져있던 무장 투쟁 세력을 모아 충칭에서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다(1940). 임시 정부는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한 뒤, 한국 광복군과 연합군이 공동으로 인도와 미얀마 전선에 참전하였다. 또한 미국과 협조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지만, 예상보다 빨랐던 일제의 패망으로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 밖에, 만주의 일본 조선인들이 1930년대에 항일 유격대를 결성하여 중국 공산당군과 함께 동북 항일 연군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의열단 계통 인사들이 중국 국민당 정부의 협조를 얻어 조선 의용대를 조직하고 활동하였으며, 여기서 분화된 화북 지방의 조선 독립 동맹 계열은 조선 의용군을 창설하고 중국 공산당군과 연합한 채 항일 무장 투쟁을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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