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수난과 항일 민족 운동
<일제의 식민 정책>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일제는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식민 통치를 강행하면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 말살을 통해 일본에 완전하게 '동화'시키려 하였다. 조선 총독은 일본군 현역 대장 또는 대장 출신자 중에서 임명되었고, 일본 국왕에 직속되어 입법, 사법, 행정권 및 군대 통수권까지 장악하였다.
1910년대 일제는 무단 통치를 행하였다. 이 시기에는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등 기본권을 빼앗고, 독립운동을 탄압하였다. 또, 일제는 헌병 경찰과 헌병 보조원을 전국에 배치해 사소한 범죄 행위에 대한 즉결 심판권을 부여하여 우리 민족을 태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문화 통치를 표방하였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문화 통치는 가혹한 식민 통치를 은폐하려는 것에 불과하였다.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지만, 경찰 수와 장비 등과 같은 경찰력은 오히려 강화하였으며, 소수의 친일 분자를 키워 우리 민족을 분열시키려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민족 운동가들을 회유하는 한편, 일제에 저항하던 독립 운동가들은 철저하게 탄압하였다.
1930년대에 일제는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였고,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삼았다. 1940년대에는 태평양 전쟁을 도발하면서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의 수탈을 더욱 강화하였다. 일제는 이 시기에 우리 민족 정체성을 완전히 말살하려는 황국 신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일제는 내선 일체의 구호를 앞세워 우리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내는 일본, 선은 조선을 가리키며,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뜻으로,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동화도 민족 차별을 정당화하는 명분에 불과하였다. 또한, 성과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쳐 쓰도록 하였으며, 황국 신민 서사 암송, 궁성 요배, 신사 참배 등을 강요하였다.
이 시기 일본은 특히 강제 징용으로 조선의 노동력을 착취하였으며, 학도 지원병 제도, 징병 제도 등을 통해 수많은 우리 젊은이들을 전쟁에 동원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젊은 여성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같은 곳에서 혹사하였으며, 그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
일본 제국주의는 1932년 무렵부터 침략 전쟁을 확대해 가면서, 점령 지구에서 "군인들의 강간 행위를 방지하고, 성병 감염을 방지하며, 군사 기밀의 누설을 막는다."라는 구실로 우리나라와 중국, 타이완 및 점령 지역의 10만~20만 명에 이르는 여성을 속임수와 폭력을 통해 연행하였다. 이들은 만주, 중국, 미얀마,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파퓨아 뉴기니, 태평양에 있는 여러 섬과 일본, 한국 등에 있는 점령지에서 인권을 박탈당한 성적 행위를 강요당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 귀국하지 않은 피해자 중에는 현지에 버려지거나, 자결을 강요당하거나 학살당한 경우도 있었다. 운 좋게 생존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사회적인 소외와 수치심, 가난, 병약해진 몸으로 인해 평생을 신음하며 살아가야 했다.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교육 자료 1>
<3·1 운동>
우리 민족은 비록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식민 지배를 받았으나, 끊임없이 광복을 위한 노력을 해왔다. 1910년대 국내에서는 많은 항일 비밀 결사 조직들이 일제에 대항하였으며, 국외에서는 만주와 연해주 등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였다.
일제의 강점 이후 무단 통치로 민족 지도자들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는데, 이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제창된 민족 자결주의와, 도쿄에서 일어난 2·8 독립 선언에 고무되어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고, 국내외에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 운동은 학생, 종교인, 상인, 노동자가 참가하면서 점차 지방 도시로 확산되었으며, 그 뒤를 이어 전국의 농촌으로 파급되었다. 만세 시위는 처음엔 비폭력 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차츰 면사무소, 헌병 주재소, 동양 척식 주식회사 등 식민 통치 기관과 친일 지주 등을 습격하는 무력적 저항 운동으로 변화하였다. 3·1 운동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 연해주, 미국, 일본 등지에서도 국외 동포에 의해 전개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만세 시위 탄압을 위해 온갖 무력을 동원하였다.
3·1 운동은 전 민족이 참여한 대규모 독립운동으로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한 차원 높이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또한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과 자신감을 갖게 하였으며, 국내외에서 민족의 주체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 약소 민족의 독립운동에도 큰 자극을 주었다.
● 일제의 3·1 운동 탄압
만세 시위가 확산되자, 일제는 헌병 경찰은 물론이고 군인까지 긴급 출동시켜 시위 군중을 무차별 살상하였다. 정주, 사천, 맹산, 수안, 남원, 합천 등지에서는 일본 군경의 총격으로 수십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화성 제암리에서는 전 주민을 교회에 집합, 감금하고 불을 질러 학살하였다. ······ 당시 만세 시위에 참가한 인원은 총 200여만 명이며, 일본 군경에 피살당한 사람은 7509명, 부상당한 사람은 15,850명, 체포된 사람은 45,306명이었고,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소였다.
<한국 독립운동 지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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