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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의 경제 - 경제 정책 경제 정책 조선은 재정을 확충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농본주의 경제 정책을 표방했다. 농경지 확대를 통해 농업 생산력 증가 시키고 농민의 조세 부담을 절감하여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건국 초기부터 토지 개간을 적극적으로 장려해 양전 사업을 실시한 결과, 고려 말에 50여만 결이었던 경지 면적이 15세기 중반 세조 대에는 160여만 결로 증가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농업 생산력 향상을 위해 새로운 농업 기술과 농기구를 적극적으로 개발하여 민간에 보급하였다. 농업은 적극적으로 장려했지만, 상공업자가 마음대로 영업하는 것은 철저하게 규제하였다. 당시 사대부들은 재화를 국가가 통제하지 않고 자유 경제로 내버려 두면 사치와 낭비가 조장되고, 이로 인해 농업이 피폐해져 빈부 격차가 커질 .. 2023. 1. 26.
근세의 정치 - 양 난의 극복 양 난의 극복 15세기 일본과의 관계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것에 비해 16세기에는 일본과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일본인의 무역 요구는 거세졌던 것에 반에 조선 정부의 통제는 점차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3포 왜란과 을묘왜변이 중종과 명종 대에 일어났다. 3포를 개항한 이후, 특히 명종 10년에 왜인이 7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전라남도 연안을 습격한 사건을 을묘왜변이라 하는데 이후 일본과의 교류는 일시적으로 단절됐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비변사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하게 했으며 일본에 사신을 보내 정세를 살펴보는 등의 노력을 하였다.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뒤였는데,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를 한 후 20만 대군을 이끌고 1592년.. 2023. 1. 26.
근세의 정치 - 사림의 대두와 붕당정치(2),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사림의 대두와 붕당정치 마침내 선조가 즉위하면서 그동안 향촌 사회에 숨어 세력을 확장해오던 사림 세력이 대거 중앙으로 진출하면서 정치 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 세력은 이전의 척신 정치의 잔재를 어떻게 청산하느냐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게 되었다. 명종 때 이후부터 정권에 참여했던 기성 사림은 척신 정치를 과감하게 개혁하는 것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던 반면에 새롭게 정권에 차명하게 된 신진 사림은 철저하게 원칙을 지켜 척신 정치를 청산해 사림 정치의 실현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두 세력의 갈등은 심화되었고 기성 사림을 중심으로 서인이 형성되었으며 신진 사림을 중심으로 동인이 형성되었다. 이황과 조식, 서경덕의 학문을 이어받은 동인은 다수의 신진 사림 세력이 참여하여 먼저 붕당의 형태를 이루었던 반면.. 2023. 1. 25.
근세의 정치 - 통치 체제의 정비(2), 사림의 대두와 붕당 정치(1) 통치 체제의 정비 조선 시대에는 주로 과거나 음서, 천거 등을 통하여 관리를 선발하였다. 과거의 종류로는 문관을 선발하는 문과와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 그리고 기술관을 선발하는 잡과가 있었다. 문과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식년시와 비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증광시, 알성시 등이 있었다. 문과의 식년시 같은 경우엔 각 도의 인구 비례에 따라 합격자를 선발하는 초시, 초시 합격자들 중에서 33명을 선발하는 2차 시험인 복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왕의 주관하에 실시하는 전시를 통해 순위를 결정지었다. 천인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제한 없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지만, 탐관오리의 아들, 재가한 여자의 아들과 손자, 그리고 서얼은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다. 문과(대과)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먼.. 2023. 1. 25.
근세의 정치 - 통치 체제의 정비(1) 통치 체제의 정비 조선의 중앙 정치 체제는 성종 때 편찬 완료된 경국대전에 명시되어 법제화되었다. 관리는 양반으로 문반과 무반으로 구성되었고, 30등급(18품 30계)으로 나뉘었다. 조선 시대의 관직은 국정 총괄의 역할을 하는 의정부와 그 아래 국왕의 명을 집행하는 행정 기관인 6조로 구성된 경관직(중앙 관직)과 외관직(지방 관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6조 아래에는 여러 관청이 업무를 나누어 맡아 행정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으며, 의정부와 6조의 고관들이 중요 정책 회의에 참여하거나 또는 국왕과 함께 경연에 참석하여 정책에 대한 논의를 진행함으로써 각 관서 사이의 업무들을 조정하고 통일적으로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으로 불리는 3사는 고려시대와 다르게 관리들의 비리.. 2023. 1. 25.
근세의 정치 - 근세 사회의 성립 근세 사회의 성립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 군사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본격적인 개혁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신진 사대부 사이에서는 개혁을 어떻게 진행할 것이냐를 두고 두 갈래의 의견이 대립하였다. 이색, 정몽주처럼 신진 사대부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온건 개혁파는 고려 왕조의 틀은 그대로 두고 그 안에서 점진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는 방안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고려 후기 비리의 핵심 세력이었던 권문세족을 제거하고 그들의 대토지 사유는 정비하되, 왕조 질서는 그대로 두고 전면적인 토지 개혁은 반대하였다. 하지만 정도전 등의 소수 급진 개혁파는 고려 왕조 자체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역성혁명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전면적인 토지 개혁을 통해 권세가에 의한 토지 사유를 축소하려 하였다. 급진 개.. 2023.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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