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분류 전체보기36 근·현대의 정치 - 개화와 주권 수호 운동(2) 개화와 주권 수호 운동 조선 내에서 개화 정책이 추진됐음에도 불구하고 삼정의 문란, 근대 문물의 수용, 각종 배상금 지불, 일본의 경제적 침투 등으로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은 더욱 커졌으며 정치·사회적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의 사회 변역 욕구 역시 높아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인간 평등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이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확산하였다. 동학 농민 운동은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되었다. 농민층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욕스럽고 포악한 수탈에 봉기하였다. 이후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을 앞세워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였다. 정부와 농민군은 전주에서 만나 폐단이 많은 정치 개혁에 합의하였다. 특히 농민군은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이를 실천해나갔다. 집강소는 전주 화약 .. 2023. 1. 30. 근·현대의 정치 - 개화와 주권 수호 운동(1) 개화와 주권 수호 운동 19세기 중엽의 조선 사회는, 내적으로 세도 정치에 저항하는 민중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으며, 외적으로는 일본과 서양 열강이 침략해 오고 있었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흥선 대원군은 조선 왕조의 위기를 극복하고 실추된 왕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 경복궁 중건, 비변사 폐지,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 회복, 대전회통 편찬 등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다. 또한, 붕당의 근거지로 인식되었던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철폐하였으며, 농민 봉기의 원인으로 지목된 삼정을 해결하여 국가 재정 확충 및 민생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1866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의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전국에 척화비를 건립하였다. 척화.. 2023. 1. 30. 근대 태동기의 문화 - 문화의 새 경향(2) 문화의 새 경향 조선 후기 그림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새 경향은 진경 산수화와 풍속화의 유행이었고, 서예에서는 우리의 정서를 담은 글씨의 등장이었다. 진경 산수화는 우리 자연을 사실적으로 그려 회화의 토착화를 이룩하였다. 풍속화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 정경과 일상 모습을 생동감 있게 나타내어 회화의 폭을 확대하였다. 17세기부터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상승하였고, 이러한 의식은 우리 고유 정서와 자연을 표현하는 예술 운동으로 이어졌다. 진경 산수화는 중국의 남종과 북종 화법을 골고루 수용하여 우리의 고유한 자연과 풍속에 맞춘 새로운 화법으로 창안한 것이다. 진경 산수화의 개척자는 18세기 정선이었다. 정선은 서울 근교와 강원도 명승지를 두루 답사하고 그것들을 사실적으로 그려 냈다. 정선의 대표작인.. 2023. 1. 29. 근대 태동기의 문화 - 문화의 새 경향(1) 문화의 새 경향 조선 후기에는 상공업이 발달하고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이를 배경으로 한 문화면에서 새로운 기운이 대두되었다. 서당 교육이 보급되고, 서민의 경제적·신분적 지위가 향상됨에 따라 서민 문화가 나타났다. 기존 양반을 중심으로 유교적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던 문예 활동에 중인과 서민이 참여하면서 큰 변화가 생겨났다. 특히, 역관이나 서리 등의 중인층과 상공업 계층 그리고 부농층의 문예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상민이나 광대의 활동도 활기는 띠었다. 조선 전기의 문예는 교양이나 심성 수련을 목표로 하여 정적이고 소극적이었던 반면, 조선 후기의 문예는 적나라한 감정 표현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경향은 자연스럽게 양반의 위선적인 모습을 비판하는 동시에 사회의 부정과 비리를 풍자하고 고발하는 경향을 .. 2023. 1. 29. 근대 태동기의 문화 - 과학 기술의 발달 과학 기술의 발달 조선 후기에는 전통적 과학 기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동시에 중국을 통하여 전래된 서양의 과학 기술을 수용하여 과학 기술 분야에서도 큰 진전이 있었다. 서양의 문물은 17세기경부터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에 의해 국내에 소개되었다. 선조 때 이광정은 세계지도를 전하였고, 인조 때 정두원은 화포, 천리경, 자명종 등을 들여왔다. 당시 명과 청의 수도였던 베이징에는 서양 선교사가 있었는데, 조선의 사신은 이 곳에서 서양 선교사들과 접촉하여 서양 문물을 소개받았다. 서양 문물의 수용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주로 이익과 그의 제자들 및 북학파 실학자들이었다. 이익의 제자들 중 일부는 서양의 종교였던 천주교까지 수용한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서양의 과학 기술만을 받아들일 뿐 천주교는 배척.. 2023. 1. 29. 근대 태동기의 문화 - 실학의 발달(2) 실학의 발달 18세기 후반에는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 진흥과 기술 혁신을 주장하는 실학자가 나타났다. 이들은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에 힘쓰자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을 이용후생 학파 또는 북학파라고 부른다. 북학파 실학사상의 대두는 병자호란 이후 고착화되었던 화이론적 명분론에서 탈피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의 선구자는 18세기 전반의 유수원이었다. 그는 우서를 편찬하여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강조하였고, 사농공상의 직업적 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 유수원은 농업에서 토지 제도의 개혁보다 농업의 상업적 경영과 기술 혁신을 통한 생산력 향상을 주장하였다. 북학파의 실학 사상은 18세기 후반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에 의하여 가장 크게 발.. 2023. 1. 29. 근대 태동기의 문화 - 성리학의 변화, 실학의 발달(1) 성리학의 변화 인조반정 이후 정권을 잡은 서인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당시 조선 사회가 가지고 있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명분론을 강화하고 성리학을 절대화하였다. 반면에, 17세기 후반에는 성리학을 상대화하고 6경과 제자백가 등에서 모순 해결의 사상적 기반을 찾으려는 경향이 윤휴와 박세당 등에 의해 대두되었다. 이들은 주자의 학문 체계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기에 당시 서인(노론)의 공격을 받아 유교에서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인 사문난적으로 몰리기도 하였다. 성리학에 대한 학자들의 이해도가 깊어지면서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철학 논쟁이 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16세기 후반에는 이황 학파와 이이 학파 사이에서 이기론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이어, 18세기에는 이이 학.. 2023. 1. 29. 근대 태동기의 사회 - 사회 변혁의 움직임(2) 사회 변혁의 움직임 천주교는 17세기 중국 베이징의 천주당을 방문했던 우리나라 사신들에 의해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학문으로 소개되었던 천주교가 신앙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당시 정치와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민하던 남인 계열의 일부 실학자들이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서양인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후부터 천주교 신앙 활동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초기에 정부는 천주교가 유포되는 것에 대해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저절로 사라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점차 교세가 확장되고 천주교가 조상에 대한 유교적 제사 의식을 거부하자,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부정과 국왕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사교로 규정하.. 2023. 1. 28. 근대 태동기의 사회 - 향촌 질서의 변화, 사회 변혁의 움직임(1) 향촌 질서의 변화 경제적 변동과 신분제의 동요 속에서 사족이 중심이 되었던 향촌 질서도 변화하였다. 평민과 천민 중 재산을 축적하여 부농층으로 성장한 사람도 있었으며, 양반 중에서도 토지를 잃고 몰락하여 전호가 되거나 심한 경우에는 임노동자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향촌 사회 내에서 양반이 지녔던 권위도 점차 약해졌다. 양반의 권위 약화로 군현 단위의 농민을 지배하기 어렵게 되자, 촌락 단위의 동약을 시행하거나, 족적 결합을 강화함으로써 자기들의 지위를 지켜 나가고자 하였다. 이에 다라 전국에 많은 동족 마을이 만들어졌고, 문중을 중심으로 한 서원과 사우가 많이 설립되었다. 향촌 사회에서 이전까지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양반은 새로 성장한 부농층의 도전을 받았다. 요호 부민이라 불렸던 조선 .. 2023. 1. 28. 근대 태동기의 사회 - 사회 구조의 변동 사회 구조의 변동 조선 후기에는 양반 사이에서 정치적 갈등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어느 특정 붕당이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가 전개되었다. 권력을 획득한 일부 양반을 제외한 나머지 다수의 양반은 이 과정에서 몰락하기도 하였다. 정권에서 배제된 양반은 관직 등용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향촌 사회에서 겨우 위세를 유지한 향반이 되거나 이조차도 하지 못하고 더욱 몰락한 잔반이 되기도 하였다. 향촌 사회에서도 사회 경제적 변화를 통해 활발한 신분 변동이 일어났다. 양반의 수는 증가하고, 상민과 노비의 수는 갈수록 감소하였다. 이는 부를 얻게 된 농민이 지위를 높이거나 역의 부담을 피하기 위해 양반 신분을 매수하거나 족보를 위조하여 양반 행세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 사회 .. 2023. 1. 28. 이전 1 2 3 4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