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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태동기의 경제 -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조선 후기에는 농업 생산력이 향상되고 수공업 생산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상품의 유통 또한 활성화되었다. 토지와 각종 역을 돈으로 환산해서 납부하는 부세 및 소작료의 금납화, 인구의 자연적 증가 그리고 인구의 도시 유입 등은 상품 화폐 경제를 더욱 빠르게 진전시켰다. 조선 후기 상업 활동을 주도했던 상인은 공인과 사상이었다. 초기에는 공인이 상업 활동을 주도하였지만 18세기 이후에는 사상이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사상은 주로 칠패, 송파 등 도성 주변에서 활동하였지만, 개성, 평양, 의주, 동례 등 지방 도시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사상은 각 지방의 장시를 연결하면서 물품을 교역하고, 각 지역에 지점을 두어 상권을 확장하였다. 개성의 송상은 전국에 지점.. 2023. 1. 28.
근대 태동기의 경제 - 서민 경제의 발전 서민 경제의 발전 양 난 이후, 양반은 토지 개간에 주력하면서 농민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사들여 농토를 늘렸다. 그렇게 넓힌 토지를 소작 농민에게 빌려주고 소작료를 받는 지주 전호제로 농장을 경영하였는데, 지주 전호제는 18세기 말에 이르러 보편적으로 시행되었다.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지주 전호제도 변화해갔다. 양반은 양반과 지주라는 신분적·경제적 지위를 이용하여 농민에게 소작료와 그 밖의 부담을 자유롭게 강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작인의 저항이 점차 심해지자, 소작인의 소작권을 인정하고, 소작료도 정액화하거나 감면하는 추세가 나타났다. 결국 지주 전호제가 지주와 전호 사이의 신분적인 관계이기보다 경제적인 관계로 변화하였다. 대부분의 양반은 소작료를 거두어 생활하거나, 소작료로 받은 미곡을 시.. 2023. 1. 28.
근대 태동기의 경제 - 수취 체제의 개편 수취 체제의 개편 임진왜란 그리고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농촌 사회는 심각한 수준으로 파괴되었다. 수많은 농민이 전쟁 중에 사망하거나 피난을 갔고, 경작지는 황폐해졌다. 게다가 기근과 질병까지 널리 퍼져서 농촌 생활의 어려움은 극에 달하였다. 하지만 농민의 조세 부담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양반 지배층은 정치적 다툼에만 관심이 있었고, 민생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지배층에 실망한 농민들을 겉으로 불만을 드러내고 스스로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국가는 수취 체제를 개편하여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고 국가의 재정 기반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이는 전세 제도, 공납 제도 그리고 군역 제도의 개편으로 나타났다. 두 번의 전쟁을 겪은 후 조선 정부는 농경지의 황폐화와 전세 제도의 문란.. 2023. 1. 27.
근대 태동기의 정치 - 붕당 정치의 전개와 탕평 정치(2), 정치 질서의 변화, 대외 관계의 변화 붕당 정치의 전개와 탕평 정치 서인이 남인을 역모로 몰아 정권을 독점한 경신환국(1680) 이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노론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대의명분을 중시하고, 민생 안정을 강조하는 정책을 펼쳤지만 소론은 윤증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실리를 중시하고, 적극적인 북방 정책을 주장하는 경향을 보였다. 숙종의 탕평 정치는 불완전했지만, 영조가 즉위하면서 탕평 정치는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사실 탕평이란 서경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정치가 한쪽의 편을 들지 않고 사심이 없으며, 당을 이루지도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영조는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를 펼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 2023. 1. 27.
근대 태동기의 정치 - 통치 체제의 변화, 붕당 정치의 전개와 탕평 정치(1) 통치 체제의 변화 붕당 정치가 점차 전개되면서 정치 구조적인 면에서는 비변사의 기능이 확대되고, 3사의 기능이 변하는 등 여러 변화가 나타났다. 16세기 중종 초에 여진족과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임시 회의 기구로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초기의 비변사는 3정승이었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3정승을 비롯하여 전·현직 정승, 공조를 제외한 5조의 판서와 참판, 각 군영의 대장, 대제학, 강화유수 등 국가의 주요 관원들로 확대됐으며, 그 기능도 단순 군사 문제뿐만 아니라 외교, 재정, 사회, 인사 등 대부분의 정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이처럼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자, 의정부와 6조 중심의 행정체계는 유명무실해졌다. 한편 언론을 담당하던 3사의 기능도 변질하였다. 청요직이라고 불리던 과거와는 다르게 3사는 각.. 2023. 1. 27.
근세의 문화 - 민족 문화의 융성 민족 문화의 융성 조선 초기에는 민족적인 동시에 실용적인 학문이 발달하여 다른 시기보다 민족 문화가 크게 발달할 수 있었다. 당시의 집권층이었던 관학파는 민생 안정 및 부국강병을 목표로 과학 기술과 실용적인 학문을 중시하였다. 또한, 민족 문화 발달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우리의 문자인 한글 창제를 통해 민족 문화의 기반을 세우고 민족 문화가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 이들 관학파는 15세기의 문화 발전을 주도하였는데, 성리학을 기본적인 지도 이념으로 내세웠지만, 부국강병과 중앙 집권 체제의 강화 그리고 민생 안정에 도움이 되는 다른 학문도 배척하지 않고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로 인해 민족적이면서도 자주적인 성격을 띠는 민족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다. 우리 나라는 오래전부터 일상생.. 2023. 1. 27.
근세의 사회 - 사회 정책과 사회 시설, 향촌 사회의 조직과 운영 사회 정책과 사회 시설 조선 시대에는 기본적으로 농본 정책을 펼쳐 농민 안정을 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국가는 양반 지주들이 토지를 지나치게 겸병하는 것을 제한하고, 농민이 토지에서 이탈하여 유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안정적으로 농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왔다. 국가는 각종 재해로 인해 피해를 당한 농민의 조세를 감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혜 정책에도 불구하고 농민의 생활은 자주 곤경에 빠졌다. 국가는 이를 돕기 위해 의장, 상평창 등을 설치하고 환곡제를 통해 피해 농민을 구제하였다. 국가가 아닌 향촌 사회에서 자체적으로 양반 지주들이 향촌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해 사창 제도를 운영하곤 했는데, 이는 향촌의 기반인 농민 생활을 안정시켜 양반 중심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조선 시대의 의료 시설로.. 2023. 1. 27.
근세의 사회 - 양반 관료 중심의 사회 양반 관료 중심의 사회 조선 시대는 양천 제도가 법제화된 사회였다. 백성의 신분을 양인과 천민으로 구분하는 제도였는데, 양인은 과거 응시가 가능하고 벼슬을 할 수 있는 자유민이었던 반면에 천민은 비자유민으로서 개인이나 국가에 소속된 채 천역을 담당하였다. 양인에게는 조세, 국역 등의 의무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양천제가 원칙대로만 운영되지는 않았다. 양반은 본래 관직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의 신분으로 고착되었고, 양반 관료들을 옆에서 돕던 중인도 하나의 신분층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하여 양반이라는 지배층과 상민이라는 피지배층 사이의 차별을 부각하는 반상 제도가 보급되었고, 양반, 중인, 상인, 천민의 신분 제도가 점차 뿌리를 내렸다. 조선 시대는 원칙적으로는 엄격한 신분 사회였으.. 2023. 1. 26.
근세의 경제 - 양반과 평민의 경제 활동(2) 양반과 평민의 경제 활동 조선은 유교 국가로서 고려보다도 상업 활동을 강력하게 통제하였다.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종로 거리에 상점가를 조성했고 여기에 개경에 있던 시전 상인을 한양으로 이주시키고 장사를 가능하게 했다. 장사권을 주면서 점포세와 상세를 거두었고 이들 시전 상인은 관상으로, 왕실이나 관청에 물품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면서,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부여받았다. 시전 중 명주, 종이, 모시, 삼베, 어물, 무명의 6가지를 파는 점포들이 가장 번성하였는데, 나중에는 이를 육의전이라고 불렀다. 또 시전 상인들의 불법적 상행위 통제를 위해 경시서라는 관청을 두었다. 15세기 후반에 서울 근교와 지방에서 농업 생산력이 발달하면서 장시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농업을 장려했던 정부는 농민이 농지.. 2023. 1. 26.
근세의 경제 - 양반과 평민의 경제 활동(1) 양반과 평민의 경제활동 양반들은 녹봉, 과전 그리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와 노비 등으로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들은 대부분이 지주였고, 주된 수입원은 토지와 노비에게서 나왔다. 특히, 양반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는 비옥한 땅이 많았던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었고, 그 규모가 커서 농장 형태를 이루었다. 양반은 노비에게 직접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의 경작을 맡겼다. 토지의 규모가 너무 커서 노비의 노동력만으로 경작이 힘든 경우, 그 주변 농민에게 총생산량의 절반을 나누는 병작반수의 형태로 소작시켰다. 양반은 자신 소유의 토지 근처에 집과 창고를 지어 노비를 직접 감독하고 농장을 살피기도 했지만, 대부분 자신의 친족을 그곳에 보내 대신 관리하게 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2023.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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