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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31

근세의 문화 - 민족 문화의 융성 민족 문화의 융성 조선 초기에는 민족적인 동시에 실용적인 학문이 발달하여 다른 시기보다 민족 문화가 크게 발달할 수 있었다. 당시의 집권층이었던 관학파는 민생 안정 및 부국강병을 목표로 과학 기술과 실용적인 학문을 중시하였다. 또한, 민족 문화 발달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우리의 문자인 한글 창제를 통해 민족 문화의 기반을 세우고 민족 문화가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 이들 관학파는 15세기의 문화 발전을 주도하였는데, 성리학을 기본적인 지도 이념으로 내세웠지만, 부국강병과 중앙 집권 체제의 강화 그리고 민생 안정에 도움이 되는 다른 학문도 배척하지 않고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로 인해 민족적이면서도 자주적인 성격을 띠는 민족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다. 우리 나라는 오래전부터 일상생.. 2023. 1. 27.
근세의 사회 - 사회 정책과 사회 시설, 향촌 사회의 조직과 운영 사회 정책과 사회 시설 조선 시대에는 기본적으로 농본 정책을 펼쳐 농민 안정을 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국가는 양반 지주들이 토지를 지나치게 겸병하는 것을 제한하고, 농민이 토지에서 이탈하여 유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안정적으로 농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왔다. 국가는 각종 재해로 인해 피해를 당한 농민의 조세를 감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혜 정책에도 불구하고 농민의 생활은 자주 곤경에 빠졌다. 국가는 이를 돕기 위해 의장, 상평창 등을 설치하고 환곡제를 통해 피해 농민을 구제하였다. 국가가 아닌 향촌 사회에서 자체적으로 양반 지주들이 향촌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해 사창 제도를 운영하곤 했는데, 이는 향촌의 기반인 농민 생활을 안정시켜 양반 중심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조선 시대의 의료 시설로.. 2023. 1. 27.
근세의 사회 - 양반 관료 중심의 사회 양반 관료 중심의 사회 조선 시대는 양천 제도가 법제화된 사회였다. 백성의 신분을 양인과 천민으로 구분하는 제도였는데, 양인은 과거 응시가 가능하고 벼슬을 할 수 있는 자유민이었던 반면에 천민은 비자유민으로서 개인이나 국가에 소속된 채 천역을 담당하였다. 양인에게는 조세, 국역 등의 의무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양천제가 원칙대로만 운영되지는 않았다. 양반은 본래 관직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의 신분으로 고착되었고, 양반 관료들을 옆에서 돕던 중인도 하나의 신분층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하여 양반이라는 지배층과 상민이라는 피지배층 사이의 차별을 부각하는 반상 제도가 보급되었고, 양반, 중인, 상인, 천민의 신분 제도가 점차 뿌리를 내렸다. 조선 시대는 원칙적으로는 엄격한 신분 사회였으.. 2023. 1. 26.
근세의 경제 - 양반과 평민의 경제 활동(2) 양반과 평민의 경제 활동 조선은 유교 국가로서 고려보다도 상업 활동을 강력하게 통제하였다.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종로 거리에 상점가를 조성했고 여기에 개경에 있던 시전 상인을 한양으로 이주시키고 장사를 가능하게 했다. 장사권을 주면서 점포세와 상세를 거두었고 이들 시전 상인은 관상으로, 왕실이나 관청에 물품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면서,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부여받았다. 시전 중 명주, 종이, 모시, 삼베, 어물, 무명의 6가지를 파는 점포들이 가장 번성하였는데, 나중에는 이를 육의전이라고 불렀다. 또 시전 상인들의 불법적 상행위 통제를 위해 경시서라는 관청을 두었다. 15세기 후반에 서울 근교와 지방에서 농업 생산력이 발달하면서 장시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농업을 장려했던 정부는 농민이 농지.. 2023. 1. 26.
근세의 경제 - 양반과 평민의 경제 활동(1) 양반과 평민의 경제활동 양반들은 녹봉, 과전 그리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와 노비 등으로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들은 대부분이 지주였고, 주된 수입원은 토지와 노비에게서 나왔다. 특히, 양반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는 비옥한 땅이 많았던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었고, 그 규모가 커서 농장 형태를 이루었다. 양반은 노비에게 직접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의 경작을 맡겼다. 토지의 규모가 너무 커서 노비의 노동력만으로 경작이 힘든 경우, 그 주변 농민에게 총생산량의 절반을 나누는 병작반수의 형태로 소작시켰다. 양반은 자신 소유의 토지 근처에 집과 창고를 지어 노비를 직접 감독하고 농장을 살피기도 했지만, 대부분 자신의 친족을 그곳에 보내 대신 관리하게 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2023. 1. 26.
근세의 경제 - 경제 정책 경제 정책 조선은 재정을 확충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농본주의 경제 정책을 표방했다. 농경지 확대를 통해 농업 생산력 증가 시키고 농민의 조세 부담을 절감하여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건국 초기부터 토지 개간을 적극적으로 장려해 양전 사업을 실시한 결과, 고려 말에 50여만 결이었던 경지 면적이 15세기 중반 세조 대에는 160여만 결로 증가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농업 생산력 향상을 위해 새로운 농업 기술과 농기구를 적극적으로 개발하여 민간에 보급하였다. 농업은 적극적으로 장려했지만, 상공업자가 마음대로 영업하는 것은 철저하게 규제하였다. 당시 사대부들은 재화를 국가가 통제하지 않고 자유 경제로 내버려 두면 사치와 낭비가 조장되고, 이로 인해 농업이 피폐해져 빈부 격차가 커질 .. 2023. 1. 26.
근세의 정치 - 양 난의 극복 양 난의 극복 15세기 일본과의 관계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것에 비해 16세기에는 일본과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일본인의 무역 요구는 거세졌던 것에 반에 조선 정부의 통제는 점차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3포 왜란과 을묘왜변이 중종과 명종 대에 일어났다. 3포를 개항한 이후, 특히 명종 10년에 왜인이 7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전라남도 연안을 습격한 사건을 을묘왜변이라 하는데 이후 일본과의 교류는 일시적으로 단절됐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비변사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하게 했으며 일본에 사신을 보내 정세를 살펴보는 등의 노력을 하였다.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뒤였는데,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를 한 후 20만 대군을 이끌고 1592년.. 2023. 1. 26.
근세의 정치 - 사림의 대두와 붕당정치(2),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사림의 대두와 붕당정치 마침내 선조가 즉위하면서 그동안 향촌 사회에 숨어 세력을 확장해오던 사림 세력이 대거 중앙으로 진출하면서 정치 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 세력은 이전의 척신 정치의 잔재를 어떻게 청산하느냐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게 되었다. 명종 때 이후부터 정권에 참여했던 기성 사림은 척신 정치를 과감하게 개혁하는 것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던 반면에 새롭게 정권에 차명하게 된 신진 사림은 철저하게 원칙을 지켜 척신 정치를 청산해 사림 정치의 실현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두 세력의 갈등은 심화되었고 기성 사림을 중심으로 서인이 형성되었으며 신진 사림을 중심으로 동인이 형성되었다. 이황과 조식, 서경덕의 학문을 이어받은 동인은 다수의 신진 사림 세력이 참여하여 먼저 붕당의 형태를 이루었던 반면.. 2023. 1. 25.
근세의 정치 - 통치 체제의 정비(2), 사림의 대두와 붕당 정치(1) 통치 체제의 정비 조선 시대에는 주로 과거나 음서, 천거 등을 통하여 관리를 선발하였다. 과거의 종류로는 문관을 선발하는 문과와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 그리고 기술관을 선발하는 잡과가 있었다. 문과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식년시와 비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증광시, 알성시 등이 있었다. 문과의 식년시 같은 경우엔 각 도의 인구 비례에 따라 합격자를 선발하는 초시, 초시 합격자들 중에서 33명을 선발하는 2차 시험인 복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왕의 주관하에 실시하는 전시를 통해 순위를 결정지었다. 천인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제한 없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지만, 탐관오리의 아들, 재가한 여자의 아들과 손자, 그리고 서얼은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다. 문과(대과)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먼.. 2023. 1. 25.
근세의 정치 - 통치 체제의 정비(1) 통치 체제의 정비 조선의 중앙 정치 체제는 성종 때 편찬 완료된 경국대전에 명시되어 법제화되었다. 관리는 양반으로 문반과 무반으로 구성되었고, 30등급(18품 30계)으로 나뉘었다. 조선 시대의 관직은 국정 총괄의 역할을 하는 의정부와 그 아래 국왕의 명을 집행하는 행정 기관인 6조로 구성된 경관직(중앙 관직)과 외관직(지방 관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6조 아래에는 여러 관청이 업무를 나누어 맡아 행정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으며, 의정부와 6조의 고관들이 중요 정책 회의에 참여하거나 또는 국왕과 함께 경연에 참석하여 정책에 대한 논의를 진행함으로써 각 관서 사이의 업무들을 조정하고 통일적으로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으로 불리는 3사는 고려시대와 다르게 관리들의 비리.. 2023.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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