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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31

근·현대의 정치 - 대한민국의 성립과 발전(2) 대한민국의 성립과 발전 6·25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이승만 정부는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1952년에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여당이 주장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골자로 하고, 야당이 주장한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발췌하고 절충한 발췌 개헌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1954년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횟수 제한 없이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다는 내용의 개헌안이 국회 표결 결과 1표 차이로 부결되었으나, 이틀 후에 반올림(사사오입)의 논리를 내세워 통과시킨 사사오입 개헌이 핵심이었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집권 연장의 욕심으로 노골적인 부정 선거를 진행하였고, 이에 항의하는 시민과 학생의 시위를 폭력으로 진압하였다. 이를 통해 국민의 분노가 전국적으로 확.. 2023. 1. 31.
근·현대의 정치 - 대한민국의 성립과 발전(1) 대한민국의 성립과 발전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그동안의 일제 억압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한 것과 동시에 우리 민족이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독립 투쟁을 전개한 결과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준비해왔다. 임시 정부는 보통 선거를 통한 민주 공화국 수립을 규정한,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채택하여 1941년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제정하고 공포하였다. 한편, 사회주의 계열인 중국 화북 지방의 조선 독립 동맹, 만주 지역에서 항일 운동을 펼치던 단체, 그리고 국내의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 건국 동맹 역시 각각 민주 공화국 건설을 위한 원칙을 발표하였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광복의 감격 그리고 각계각층의 건국 운동이 곧바로 우리 .. 2023. 1. 31.
근·현대의 정치 - 민족의 수난과 항일 민족 운동(2) 민족의 수난과 항일 민족 운동 3·1 운동을 계기로 우리 민족은 정부를 수립하여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효과적으로 국민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서울과 연해주, 상하이에 각각 정부가 조직되었고, 1919년 9월, 세 정부를 통합하여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헌법을 갖추었으며, 민주 공화제와 대통령제를 채택하였다. 임시 정부는 입법 기관인 임시 의정원, 사법 기관인 법원, 행정 기관인 국무원을 설치하여 삼권 분립의 헌정 체제를 만들었다. 초기의 임시 정부는 갖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의 민족 독립운동을 효과적이고 조직적으로 추진하는 중추 기관의 역할과 임무를 담당하였다. 또한, 독립운동 자금 모금과 정보 수집을 위해 연통제와 통신.. 2023. 1. 30.
근·현대의 정치 - 민족의 수난과 항일 민족 운동(1) 민족의 수난과 항일 민족 운동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일제는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식민 통치를 강행하면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 말살을 통해 일본에 완전하게 '동화'시키려 하였다. 조선 총독은 일본군 현역 대장 또는 대장 출신자 중에서 임명되었고, 일본 국왕에 직속되어 입법, 사법, 행정권 및 군대 통수권까지 장악하였다. 1910년대 일제는 무단 통치를 행하였다. 이 시기에는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등 기본권을 빼앗고, 독립운동을 탄압하였다. 또, 일제는 헌병 경찰과 헌병 보조원을 전국에 배치해 사소한 범죄 행위에 대한 즉결 심판권을 부여하여 우리 민족을 태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문화 통치를 표방하였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문화 통치는 가혹한 식민 통치를 은폐하려는 것.. 2023. 1. 30.
근·현대의 정치 - 개화와 주권 수호 운동(3) 개화와 주권 수호 운동 일본은 제1차 영·일 동맹(1902)을 체결하여 국제적 입지를 강화한 후, 본격적으로 한반도 지배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1904년 러시아를 선제공격하여 러·일 전쟁을 일으켰다. 대한 제국은 국외중립을 선언하였지만,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강제로 한·일 의정서를 체결하여 정치적 간섭과 군사적 점령을 꾀하였다. 그리고 바로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하여 외고, 재정 등 각 분야에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을 두고 한국 내정을 간섭하였다. 일제는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 영국과 제2차 영·일 동맹을 맺고 나서,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러시아와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고 국제 사회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그리고 1905년에 일방적으로 을사늑약을 발표하여 대한 제국의 외.. 2023. 1. 30.
근·현대의 정치 - 개화와 주권 수호 운동(2) 개화와 주권 수호 운동 조선 내에서 개화 정책이 추진됐음에도 불구하고 삼정의 문란, 근대 문물의 수용, 각종 배상금 지불, 일본의 경제적 침투 등으로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은 더욱 커졌으며 정치·사회적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의 사회 변역 욕구 역시 높아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인간 평등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이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확산하였다. 동학 농민 운동은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되었다. 농민층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욕스럽고 포악한 수탈에 봉기하였다. 이후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을 앞세워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였다. 정부와 농민군은 전주에서 만나 폐단이 많은 정치 개혁에 합의하였다. 특히 농민군은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이를 실천해나갔다. 집강소는 전주 화약 .. 2023. 1. 30.
근·현대의 정치 - 개화와 주권 수호 운동(1) 개화와 주권 수호 운동 19세기 중엽의 조선 사회는, 내적으로 세도 정치에 저항하는 민중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으며, 외적으로는 일본과 서양 열강이 침략해 오고 있었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흥선 대원군은 조선 왕조의 위기를 극복하고 실추된 왕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 경복궁 중건, 비변사 폐지,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 회복, 대전회통 편찬 등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다. 또한, 붕당의 근거지로 인식되었던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철폐하였으며, 농민 봉기의 원인으로 지목된 삼정을 해결하여 국가 재정 확충 및 민생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1866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의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전국에 척화비를 건립하였다. 척화.. 2023. 1. 30.
근대 태동기의 문화 - 문화의 새 경향(2) 문화의 새 경향 조선 후기 그림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새 경향은 진경 산수화와 풍속화의 유행이었고, 서예에서는 우리의 정서를 담은 글씨의 등장이었다. 진경 산수화는 우리 자연을 사실적으로 그려 회화의 토착화를 이룩하였다. 풍속화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 정경과 일상 모습을 생동감 있게 나타내어 회화의 폭을 확대하였다. 17세기부터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상승하였고, 이러한 의식은 우리 고유 정서와 자연을 표현하는 예술 운동으로 이어졌다. 진경 산수화는 중국의 남종과 북종 화법을 골고루 수용하여 우리의 고유한 자연과 풍속에 맞춘 새로운 화법으로 창안한 것이다. 진경 산수화의 개척자는 18세기 정선이었다. 정선은 서울 근교와 강원도 명승지를 두루 답사하고 그것들을 사실적으로 그려 냈다. 정선의 대표작인.. 2023. 1. 29.
근대 태동기의 문화 - 문화의 새 경향(1) 문화의 새 경향 조선 후기에는 상공업이 발달하고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이를 배경으로 한 문화면에서 새로운 기운이 대두되었다. 서당 교육이 보급되고, 서민의 경제적·신분적 지위가 향상됨에 따라 서민 문화가 나타났다. 기존 양반을 중심으로 유교적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던 문예 활동에 중인과 서민이 참여하면서 큰 변화가 생겨났다. 특히, 역관이나 서리 등의 중인층과 상공업 계층 그리고 부농층의 문예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상민이나 광대의 활동도 활기는 띠었다. 조선 전기의 문예는 교양이나 심성 수련을 목표로 하여 정적이고 소극적이었던 반면, 조선 후기의 문예는 적나라한 감정 표현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경향은 자연스럽게 양반의 위선적인 모습을 비판하는 동시에 사회의 부정과 비리를 풍자하고 고발하는 경향을 .. 2023. 1. 29.
근대 태동기의 문화 - 과학 기술의 발달 과학 기술의 발달 조선 후기에는 전통적 과학 기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동시에 중국을 통하여 전래된 서양의 과학 기술을 수용하여 과학 기술 분야에서도 큰 진전이 있었다. 서양의 문물은 17세기경부터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에 의해 국내에 소개되었다. 선조 때 이광정은 세계지도를 전하였고, 인조 때 정두원은 화포, 천리경, 자명종 등을 들여왔다. 당시 명과 청의 수도였던 베이징에는 서양 선교사가 있었는데, 조선의 사신은 이 곳에서 서양 선교사들과 접촉하여 서양 문물을 소개받았다. 서양 문물의 수용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주로 이익과 그의 제자들 및 북학파 실학자들이었다. 이익의 제자들 중 일부는 서양의 종교였던 천주교까지 수용한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서양의 과학 기술만을 받아들일 뿐 천주교는 배척.. 2023.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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