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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31

근대 태동기의 문화 - 실학의 발달(2) 실학의 발달 18세기 후반에는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 진흥과 기술 혁신을 주장하는 실학자가 나타났다. 이들은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에 힘쓰자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을 이용후생 학파 또는 북학파라고 부른다. 북학파 실학사상의 대두는 병자호란 이후 고착화되었던 화이론적 명분론에서 탈피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의 선구자는 18세기 전반의 유수원이었다. 그는 우서를 편찬하여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강조하였고, 사농공상의 직업적 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 유수원은 농업에서 토지 제도의 개혁보다 농업의 상업적 경영과 기술 혁신을 통한 생산력 향상을 주장하였다. 북학파의 실학 사상은 18세기 후반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에 의하여 가장 크게 발.. 2023. 1. 29.
근대 태동기의 문화 - 성리학의 변화, 실학의 발달(1) 성리학의 변화 인조반정 이후 정권을 잡은 서인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당시 조선 사회가 가지고 있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명분론을 강화하고 성리학을 절대화하였다. 반면에, 17세기 후반에는 성리학을 상대화하고 6경과 제자백가 등에서 모순 해결의 사상적 기반을 찾으려는 경향이 윤휴와 박세당 등에 의해 대두되었다. 이들은 주자의 학문 체계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기에 당시 서인(노론)의 공격을 받아 유교에서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인 사문난적으로 몰리기도 하였다. 성리학에 대한 학자들의 이해도가 깊어지면서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철학 논쟁이 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16세기 후반에는 이황 학파와 이이 학파 사이에서 이기론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이어, 18세기에는 이이 학.. 2023. 1. 29.
근대 태동기의 사회 - 사회 변혁의 움직임(2) 사회 변혁의 움직임 천주교는 17세기 중국 베이징의 천주당을 방문했던 우리나라 사신들에 의해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학문으로 소개되었던 천주교가 신앙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당시 정치와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민하던 남인 계열의 일부 실학자들이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서양인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후부터 천주교 신앙 활동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초기에 정부는 천주교가 유포되는 것에 대해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저절로 사라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점차 교세가 확장되고 천주교가 조상에 대한 유교적 제사 의식을 거부하자,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부정과 국왕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사교로 규정하.. 2023. 1. 28.
근대 태동기의 사회 - 향촌 질서의 변화, 사회 변혁의 움직임(1) 향촌 질서의 변화 경제적 변동과 신분제의 동요 속에서 사족이 중심이 되었던 향촌 질서도 변화하였다. 평민과 천민 중 재산을 축적하여 부농층으로 성장한 사람도 있었으며, 양반 중에서도 토지를 잃고 몰락하여 전호가 되거나 심한 경우에는 임노동자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향촌 사회 내에서 양반이 지녔던 권위도 점차 약해졌다. 양반의 권위 약화로 군현 단위의 농민을 지배하기 어렵게 되자, 촌락 단위의 동약을 시행하거나, 족적 결합을 강화함으로써 자기들의 지위를 지켜 나가고자 하였다. 이에 다라 전국에 많은 동족 마을이 만들어졌고, 문중을 중심으로 한 서원과 사우가 많이 설립되었다. 향촌 사회에서 이전까지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양반은 새로 성장한 부농층의 도전을 받았다. 요호 부민이라 불렸던 조선 .. 2023. 1. 28.
근대 태동기의 사회 - 사회 구조의 변동 사회 구조의 변동 조선 후기에는 양반 사이에서 정치적 갈등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어느 특정 붕당이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가 전개되었다. 권력을 획득한 일부 양반을 제외한 나머지 다수의 양반은 이 과정에서 몰락하기도 하였다. 정권에서 배제된 양반은 관직 등용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향촌 사회에서 겨우 위세를 유지한 향반이 되거나 이조차도 하지 못하고 더욱 몰락한 잔반이 되기도 하였다. 향촌 사회에서도 사회 경제적 변화를 통해 활발한 신분 변동이 일어났다. 양반의 수는 증가하고, 상민과 노비의 수는 갈수록 감소하였다. 이는 부를 얻게 된 농민이 지위를 높이거나 역의 부담을 피하기 위해 양반 신분을 매수하거나 족보를 위조하여 양반 행세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 사회 .. 2023. 1. 28.
근대 태동기의 경제 -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조선 후기에는 농업 생산력이 향상되고 수공업 생산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상품의 유통 또한 활성화되었다. 토지와 각종 역을 돈으로 환산해서 납부하는 부세 및 소작료의 금납화, 인구의 자연적 증가 그리고 인구의 도시 유입 등은 상품 화폐 경제를 더욱 빠르게 진전시켰다. 조선 후기 상업 활동을 주도했던 상인은 공인과 사상이었다. 초기에는 공인이 상업 활동을 주도하였지만 18세기 이후에는 사상이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사상은 주로 칠패, 송파 등 도성 주변에서 활동하였지만, 개성, 평양, 의주, 동례 등 지방 도시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사상은 각 지방의 장시를 연결하면서 물품을 교역하고, 각 지역에 지점을 두어 상권을 확장하였다. 개성의 송상은 전국에 지점.. 2023. 1. 28.
근대 태동기의 경제 - 서민 경제의 발전 서민 경제의 발전 양 난 이후, 양반은 토지 개간에 주력하면서 농민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사들여 농토를 늘렸다. 그렇게 넓힌 토지를 소작 농민에게 빌려주고 소작료를 받는 지주 전호제로 농장을 경영하였는데, 지주 전호제는 18세기 말에 이르러 보편적으로 시행되었다.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지주 전호제도 변화해갔다. 양반은 양반과 지주라는 신분적·경제적 지위를 이용하여 농민에게 소작료와 그 밖의 부담을 자유롭게 강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작인의 저항이 점차 심해지자, 소작인의 소작권을 인정하고, 소작료도 정액화하거나 감면하는 추세가 나타났다. 결국 지주 전호제가 지주와 전호 사이의 신분적인 관계이기보다 경제적인 관계로 변화하였다. 대부분의 양반은 소작료를 거두어 생활하거나, 소작료로 받은 미곡을 시.. 2023. 1. 28.
근대 태동기의 경제 - 수취 체제의 개편 수취 체제의 개편 임진왜란 그리고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농촌 사회는 심각한 수준으로 파괴되었다. 수많은 농민이 전쟁 중에 사망하거나 피난을 갔고, 경작지는 황폐해졌다. 게다가 기근과 질병까지 널리 퍼져서 농촌 생활의 어려움은 극에 달하였다. 하지만 농민의 조세 부담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양반 지배층은 정치적 다툼에만 관심이 있었고, 민생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지배층에 실망한 농민들을 겉으로 불만을 드러내고 스스로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국가는 수취 체제를 개편하여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고 국가의 재정 기반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이는 전세 제도, 공납 제도 그리고 군역 제도의 개편으로 나타났다. 두 번의 전쟁을 겪은 후 조선 정부는 농경지의 황폐화와 전세 제도의 문란.. 2023. 1. 27.
근대 태동기의 정치 - 붕당 정치의 전개와 탕평 정치(2), 정치 질서의 변화, 대외 관계의 변화 붕당 정치의 전개와 탕평 정치 서인이 남인을 역모로 몰아 정권을 독점한 경신환국(1680) 이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노론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대의명분을 중시하고, 민생 안정을 강조하는 정책을 펼쳤지만 소론은 윤증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실리를 중시하고, 적극적인 북방 정책을 주장하는 경향을 보였다. 숙종의 탕평 정치는 불완전했지만, 영조가 즉위하면서 탕평 정치는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사실 탕평이란 서경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정치가 한쪽의 편을 들지 않고 사심이 없으며, 당을 이루지도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영조는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를 펼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 2023. 1. 27.
근대 태동기의 정치 - 통치 체제의 변화, 붕당 정치의 전개와 탕평 정치(1) 통치 체제의 변화 붕당 정치가 점차 전개되면서 정치 구조적인 면에서는 비변사의 기능이 확대되고, 3사의 기능이 변하는 등 여러 변화가 나타났다. 16세기 중종 초에 여진족과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임시 회의 기구로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초기의 비변사는 3정승이었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3정승을 비롯하여 전·현직 정승, 공조를 제외한 5조의 판서와 참판, 각 군영의 대장, 대제학, 강화유수 등 국가의 주요 관원들로 확대됐으며, 그 기능도 단순 군사 문제뿐만 아니라 외교, 재정, 사회, 인사 등 대부분의 정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이처럼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자, 의정부와 6조 중심의 행정체계는 유명무실해졌다. 한편 언론을 담당하던 3사의 기능도 변질하였다. 청요직이라고 불리던 과거와는 다르게 3사는 각.. 202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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