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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도 부산광역시 공무원(9급) 공개경쟁채용시험 알아보기!(일정, 정보, 준비방법 등)
2023년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2023년 부산광역시 9급 시험 준비 어떻게 하실지 막막하시죠? 아래를 보면서 일정, 선발인원, 준비방법 등을 확인해보세요. 1. 시험 일정 ○ 응시원서 접수기간: 3월 13일(월) 09:00 ~ 3월 17일(금) 18:00 (취소마감: 3월 20일(월) 24:00) ○ 필기시험: 6월 10일(토) ○ 필기시험 합격자 발표: 7월 11일(화) ○ 면접시험: 8월 14일(월) ~ 8월 25일(금) ○ 최종합격자 발표: 9월 5일(화) 2. 선발예정인원 및 시험과목 행정직군 소계 1,167 공개 경쟁 행정 일반행정 9급 365 필수(5): 국어, 영어, 한국사, 행정법총론, 행정학개론(지방행정 포함) 일반행정(장애인) 9급 33 일반행정(저소득층) 9급 12..
2023.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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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도 광주광역시 공무원(9급) 공개경쟁채용시험 알아보기!(일정, 정보, 준비방법 등)
2023년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광주광역시에서 2023년에 시행하는 9급 시험 어떻게 준비하면 되는지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1. 시험 일정 ○ 응시원서 접수기간: 3월 13일(월) 09:00 ~ 3월 17일(금) 18:00 (취소마감: 3월 20일(월) 24:00) ○ 필기시험: 6월 10일(토) ○ 필기시험 합격자 발표: 7월 7일(금) ○ 면접시험: 7월 25일(화) ~ 7월 28일(금) ○ 최종합격자 발표: 8월 18일(수) 2. 선발예정인원 및 시험과목 ○ 행정 585명 ○ 세무 83명 ○ 전산 38명 ○ 사회복지 231명 ○ 사서 3명 총 선발인원 108 공개 경쟁 행정 일반행정 50 필수(5): 국어, 영어, 한국사, 행정법총론, 행정학개론(지방행정 포함) 일반행정(지방의..
2023.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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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도 경기도 공무원(7급) 공개경쟁채용시험 알아보기!(일정, 정보, 준비방법 등)
2023년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경기도에서 선발하는 7급 시험, 어떻게 준비하면 되는지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혹시 9급 공무원 시험정보를 찾고 계시다면 다음을 참고하세요! 2023년도 경기도 공무원(9급) 공개경쟁채용시험 알아보기!(일정, 정보, 준비방법 등) 2023년도 경기도 공무원(9급) 공개경쟁채용시험 알아보기!(일정, 정보, 준비방법 등) 2023년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오늘은 경기도 9급 시험 어떻게 준비하면 되는지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혹시 서울시 9급 공무원 시험정보를 찾고 계시다면 다음을 참고하세요! history.mingstory.com 2023년도 서울시 공무원(9급) 공개경쟁채용시험 알아보기!(일정, 정보, 준비방법 등) 2023년도 서울시..
2023.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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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도 경기도 공무원(9급) 공개경쟁채용시험 알아보기!(일정, 정보, 준비방법 등)
2023년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오늘은 경기도 9급 시험 어떻게 준비하면 되는지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혹시 서울시 9급 공무원 시험정보를 찾고 계시다면 다음을 참고하세요! 2023년도 서울시 공무원(9급) 공개경쟁채용시험 알아보기!(일정, 정보, 준비방법 등) 2023년도 서울시 공무원(9급) 공개경쟁채용시험 알아보기!(일정, 정보, 준비방법 등) 2023년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서울시 9급 시험 어떻게 준비하면 되는지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1. 시험 일정 ○ 응시원서 접수기간: 3월 13일(월) 09:00 ~ 3월 17일(금) 18:00 (취소마 history.mingstory.com 1. 시험 일정 ○ 응시원서 접수기간: 3월 13일(월) 09:00 ~ 3월..
2023.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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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도 서울시 공무원(9급) 공개경쟁채용시험 알아보기!(일정, 정보, 준비방법 등)
2023년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서울시 9급 시험 어떻게 준비하면 되는지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혹시 경기도 9급 공무원 시험에 대해서 궁금하시다면 아래를 참고하세요! 2023년도 경기도 공무원(9급) 공개경쟁채용시험 알아보기!(일정, 정보, 준비방법 등) 2023년도 경기도 공무원(9급) 공개경쟁채용시험 알아보기!(일정, 정보, 준비방법 등) 2023년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오늘은 경기도 9급 시험 어떻게 준비하면 되는지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혹시 서울시 9급 공무원 시험정보를 찾고 계시다면 다음을 참고하세요! history.mingstory.com 1. 시험 일정 ○ 응시원서 접수기간: 3월 13일(월) 09:00 ~ 3월 17일(금) 18:00 (취소마감: ..
2023.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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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의 정치 - 대한민국의 성립과 발전(2)
대한민국의 성립과 발전 6·25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이승만 정부는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1952년에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여당이 주장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골자로 하고, 야당이 주장한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발췌하고 절충한 발췌 개헌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1954년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횟수 제한 없이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다는 내용의 개헌안이 국회 표결 결과 1표 차이로 부결되었으나, 이틀 후에 반올림(사사오입)의 논리를 내세워 통과시킨 사사오입 개헌이 핵심이었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집권 연장의 욕심으로 노골적인 부정 선거를 진행하였고, 이에 항의하는 시민과 학생의 시위를 폭력으로 진압하였다. 이를 통해 국민의 분노가 전국적으로 확..
202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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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의 정치 - 대한민국의 성립과 발전(1)
대한민국의 성립과 발전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그동안의 일제 억압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한 것과 동시에 우리 민족이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독립 투쟁을 전개한 결과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준비해왔다. 임시 정부는 보통 선거를 통한 민주 공화국 수립을 규정한,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채택하여 1941년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제정하고 공포하였다. 한편, 사회주의 계열인 중국 화북 지방의 조선 독립 동맹, 만주 지역에서 항일 운동을 펼치던 단체, 그리고 국내의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 건국 동맹 역시 각각 민주 공화국 건설을 위한 원칙을 발표하였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광복의 감격 그리고 각계각층의 건국 운동이 곧바로 우리 ..
202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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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의 정치 - 민족의 수난과 항일 민족 운동(2)
민족의 수난과 항일 민족 운동 3·1 운동을 계기로 우리 민족은 정부를 수립하여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효과적으로 국민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서울과 연해주, 상하이에 각각 정부가 조직되었고, 1919년 9월, 세 정부를 통합하여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헌법을 갖추었으며, 민주 공화제와 대통령제를 채택하였다. 임시 정부는 입법 기관인 임시 의정원, 사법 기관인 법원, 행정 기관인 국무원을 설치하여 삼권 분립의 헌정 체제를 만들었다. 초기의 임시 정부는 갖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의 민족 독립운동을 효과적이고 조직적으로 추진하는 중추 기관의 역할과 임무를 담당하였다. 또한, 독립운동 자금 모금과 정보 수집을 위해 연통제와 통신..
2023.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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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의 정치 - 민족의 수난과 항일 민족 운동(1)
민족의 수난과 항일 민족 운동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일제는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식민 통치를 강행하면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 말살을 통해 일본에 완전하게 '동화'시키려 하였다. 조선 총독은 일본군 현역 대장 또는 대장 출신자 중에서 임명되었고, 일본 국왕에 직속되어 입법, 사법, 행정권 및 군대 통수권까지 장악하였다. 1910년대 일제는 무단 통치를 행하였다. 이 시기에는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등 기본권을 빼앗고, 독립운동을 탄압하였다. 또, 일제는 헌병 경찰과 헌병 보조원을 전국에 배치해 사소한 범죄 행위에 대한 즉결 심판권을 부여하여 우리 민족을 태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문화 통치를 표방하였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문화 통치는 가혹한 식민 통치를 은폐하려는 것..
2023.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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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의 정치 - 개화와 주권 수호 운동(3)
개화와 주권 수호 운동 일본은 제1차 영·일 동맹(1902)을 체결하여 국제적 입지를 강화한 후, 본격적으로 한반도 지배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1904년 러시아를 선제공격하여 러·일 전쟁을 일으켰다. 대한 제국은 국외중립을 선언하였지만,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강제로 한·일 의정서를 체결하여 정치적 간섭과 군사적 점령을 꾀하였다. 그리고 바로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하여 외고, 재정 등 각 분야에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을 두고 한국 내정을 간섭하였다. 일제는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 영국과 제2차 영·일 동맹을 맺고 나서,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러시아와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고 국제 사회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그리고 1905년에 일방적으로 을사늑약을 발표하여 대한 제국의 외..
2023.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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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의 정치 - 개화와 주권 수호 운동(2)
개화와 주권 수호 운동 조선 내에서 개화 정책이 추진됐음에도 불구하고 삼정의 문란, 근대 문물의 수용, 각종 배상금 지불, 일본의 경제적 침투 등으로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은 더욱 커졌으며 정치·사회적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의 사회 변역 욕구 역시 높아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인간 평등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이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확산하였다. 동학 농민 운동은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되었다. 농민층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욕스럽고 포악한 수탈에 봉기하였다. 이후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을 앞세워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였다. 정부와 농민군은 전주에서 만나 폐단이 많은 정치 개혁에 합의하였다. 특히 농민군은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이를 실천해나갔다. 집강소는 전주 화약 ..
2023.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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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의 정치 - 개화와 주권 수호 운동(1)
개화와 주권 수호 운동 19세기 중엽의 조선 사회는, 내적으로 세도 정치에 저항하는 민중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으며, 외적으로는 일본과 서양 열강이 침략해 오고 있었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흥선 대원군은 조선 왕조의 위기를 극복하고 실추된 왕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 경복궁 중건, 비변사 폐지,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 회복, 대전회통 편찬 등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다. 또한, 붕당의 근거지로 인식되었던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철폐하였으며, 농민 봉기의 원인으로 지목된 삼정을 해결하여 국가 재정 확충 및 민생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1866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의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전국에 척화비를 건립하였다. 척화..
2023.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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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태동기의 문화 - 문화의 새 경향(2)
문화의 새 경향 조선 후기 그림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새 경향은 진경 산수화와 풍속화의 유행이었고, 서예에서는 우리의 정서를 담은 글씨의 등장이었다. 진경 산수화는 우리 자연을 사실적으로 그려 회화의 토착화를 이룩하였다. 풍속화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 정경과 일상 모습을 생동감 있게 나타내어 회화의 폭을 확대하였다. 17세기부터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상승하였고, 이러한 의식은 우리 고유 정서와 자연을 표현하는 예술 운동으로 이어졌다. 진경 산수화는 중국의 남종과 북종 화법을 골고루 수용하여 우리의 고유한 자연과 풍속에 맞춘 새로운 화법으로 창안한 것이다. 진경 산수화의 개척자는 18세기 정선이었다. 정선은 서울 근교와 강원도 명승지를 두루 답사하고 그것들을 사실적으로 그려 냈다. 정선의 대표작인..
2023.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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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태동기의 문화 - 문화의 새 경향(1)
문화의 새 경향 조선 후기에는 상공업이 발달하고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이를 배경으로 한 문화면에서 새로운 기운이 대두되었다. 서당 교육이 보급되고, 서민의 경제적·신분적 지위가 향상됨에 따라 서민 문화가 나타났다. 기존 양반을 중심으로 유교적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던 문예 활동에 중인과 서민이 참여하면서 큰 변화가 생겨났다. 특히, 역관이나 서리 등의 중인층과 상공업 계층 그리고 부농층의 문예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상민이나 광대의 활동도 활기는 띠었다. 조선 전기의 문예는 교양이나 심성 수련을 목표로 하여 정적이고 소극적이었던 반면, 조선 후기의 문예는 적나라한 감정 표현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경향은 자연스럽게 양반의 위선적인 모습을 비판하는 동시에 사회의 부정과 비리를 풍자하고 고발하는 경향을 ..
2023.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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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태동기의 문화 - 과학 기술의 발달
과학 기술의 발달 조선 후기에는 전통적 과학 기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동시에 중국을 통하여 전래된 서양의 과학 기술을 수용하여 과학 기술 분야에서도 큰 진전이 있었다. 서양의 문물은 17세기경부터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에 의해 국내에 소개되었다. 선조 때 이광정은 세계지도를 전하였고, 인조 때 정두원은 화포, 천리경, 자명종 등을 들여왔다. 당시 명과 청의 수도였던 베이징에는 서양 선교사가 있었는데, 조선의 사신은 이 곳에서 서양 선교사들과 접촉하여 서양 문물을 소개받았다. 서양 문물의 수용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주로 이익과 그의 제자들 및 북학파 실학자들이었다. 이익의 제자들 중 일부는 서양의 종교였던 천주교까지 수용한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서양의 과학 기술만을 받아들일 뿐 천주교는 배척..
2023.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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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태동기의 문화 - 실학의 발달(2)
실학의 발달 18세기 후반에는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 진흥과 기술 혁신을 주장하는 실학자가 나타났다. 이들은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에 힘쓰자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을 이용후생 학파 또는 북학파라고 부른다. 북학파 실학사상의 대두는 병자호란 이후 고착화되었던 화이론적 명분론에서 탈피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의 선구자는 18세기 전반의 유수원이었다. 그는 우서를 편찬하여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강조하였고, 사농공상의 직업적 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 유수원은 농업에서 토지 제도의 개혁보다 농업의 상업적 경영과 기술 혁신을 통한 생산력 향상을 주장하였다. 북학파의 실학 사상은 18세기 후반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에 의하여 가장 크게 발..
2023.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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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태동기의 문화 - 성리학의 변화, 실학의 발달(1)
성리학의 변화 인조반정 이후 정권을 잡은 서인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당시 조선 사회가 가지고 있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명분론을 강화하고 성리학을 절대화하였다. 반면에, 17세기 후반에는 성리학을 상대화하고 6경과 제자백가 등에서 모순 해결의 사상적 기반을 찾으려는 경향이 윤휴와 박세당 등에 의해 대두되었다. 이들은 주자의 학문 체계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기에 당시 서인(노론)의 공격을 받아 유교에서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인 사문난적으로 몰리기도 하였다. 성리학에 대한 학자들의 이해도가 깊어지면서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철학 논쟁이 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16세기 후반에는 이황 학파와 이이 학파 사이에서 이기론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이어, 18세기에는 이이 학..
2023.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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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태동기의 사회 - 사회 변혁의 움직임(2)
사회 변혁의 움직임 천주교는 17세기 중국 베이징의 천주당을 방문했던 우리나라 사신들에 의해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학문으로 소개되었던 천주교가 신앙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당시 정치와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민하던 남인 계열의 일부 실학자들이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서양인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후부터 천주교 신앙 활동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초기에 정부는 천주교가 유포되는 것에 대해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저절로 사라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점차 교세가 확장되고 천주교가 조상에 대한 유교적 제사 의식을 거부하자,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부정과 국왕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사교로 규정하..
2023.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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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태동기의 사회 - 향촌 질서의 변화, 사회 변혁의 움직임(1)
향촌 질서의 변화 경제적 변동과 신분제의 동요 속에서 사족이 중심이 되었던 향촌 질서도 변화하였다. 평민과 천민 중 재산을 축적하여 부농층으로 성장한 사람도 있었으며, 양반 중에서도 토지를 잃고 몰락하여 전호가 되거나 심한 경우에는 임노동자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향촌 사회 내에서 양반이 지녔던 권위도 점차 약해졌다. 양반의 권위 약화로 군현 단위의 농민을 지배하기 어렵게 되자, 촌락 단위의 동약을 시행하거나, 족적 결합을 강화함으로써 자기들의 지위를 지켜 나가고자 하였다. 이에 다라 전국에 많은 동족 마을이 만들어졌고, 문중을 중심으로 한 서원과 사우가 많이 설립되었다. 향촌 사회에서 이전까지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양반은 새로 성장한 부농층의 도전을 받았다. 요호 부민이라 불렸던 조선 ..
2023.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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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태동기의 사회 - 사회 구조의 변동
사회 구조의 변동 조선 후기에는 양반 사이에서 정치적 갈등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어느 특정 붕당이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가 전개되었다. 권력을 획득한 일부 양반을 제외한 나머지 다수의 양반은 이 과정에서 몰락하기도 하였다. 정권에서 배제된 양반은 관직 등용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향촌 사회에서 겨우 위세를 유지한 향반이 되거나 이조차도 하지 못하고 더욱 몰락한 잔반이 되기도 하였다. 향촌 사회에서도 사회 경제적 변화를 통해 활발한 신분 변동이 일어났다. 양반의 수는 증가하고, 상민과 노비의 수는 갈수록 감소하였다. 이는 부를 얻게 된 농민이 지위를 높이거나 역의 부담을 피하기 위해 양반 신분을 매수하거나 족보를 위조하여 양반 행세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 사회 ..
2023.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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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태동기의 경제 -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조선 후기에는 농업 생산력이 향상되고 수공업 생산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상품의 유통 또한 활성화되었다. 토지와 각종 역을 돈으로 환산해서 납부하는 부세 및 소작료의 금납화, 인구의 자연적 증가 그리고 인구의 도시 유입 등은 상품 화폐 경제를 더욱 빠르게 진전시켰다. 조선 후기 상업 활동을 주도했던 상인은 공인과 사상이었다. 초기에는 공인이 상업 활동을 주도하였지만 18세기 이후에는 사상이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사상은 주로 칠패, 송파 등 도성 주변에서 활동하였지만, 개성, 평양, 의주, 동례 등 지방 도시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사상은 각 지방의 장시를 연결하면서 물품을 교역하고, 각 지역에 지점을 두어 상권을 확장하였다. 개성의 송상은 전국에 지점..
2023.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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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태동기의 경제 - 서민 경제의 발전
서민 경제의 발전 양 난 이후, 양반은 토지 개간에 주력하면서 농민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사들여 농토를 늘렸다. 그렇게 넓힌 토지를 소작 농민에게 빌려주고 소작료를 받는 지주 전호제로 농장을 경영하였는데, 지주 전호제는 18세기 말에 이르러 보편적으로 시행되었다.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지주 전호제도 변화해갔다. 양반은 양반과 지주라는 신분적·경제적 지위를 이용하여 농민에게 소작료와 그 밖의 부담을 자유롭게 강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작인의 저항이 점차 심해지자, 소작인의 소작권을 인정하고, 소작료도 정액화하거나 감면하는 추세가 나타났다. 결국 지주 전호제가 지주와 전호 사이의 신분적인 관계이기보다 경제적인 관계로 변화하였다. 대부분의 양반은 소작료를 거두어 생활하거나, 소작료로 받은 미곡을 시..
2023.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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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태동기의 경제 - 수취 체제의 개편
수취 체제의 개편 임진왜란 그리고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농촌 사회는 심각한 수준으로 파괴되었다. 수많은 농민이 전쟁 중에 사망하거나 피난을 갔고, 경작지는 황폐해졌다. 게다가 기근과 질병까지 널리 퍼져서 농촌 생활의 어려움은 극에 달하였다. 하지만 농민의 조세 부담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양반 지배층은 정치적 다툼에만 관심이 있었고, 민생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지배층에 실망한 농민들을 겉으로 불만을 드러내고 스스로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국가는 수취 체제를 개편하여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고 국가의 재정 기반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이는 전세 제도, 공납 제도 그리고 군역 제도의 개편으로 나타났다. 두 번의 전쟁을 겪은 후 조선 정부는 농경지의 황폐화와 전세 제도의 문란..
2023.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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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태동기의 정치 - 붕당 정치의 전개와 탕평 정치(2), 정치 질서의 변화, 대외 관계의 변화
붕당 정치의 전개와 탕평 정치 서인이 남인을 역모로 몰아 정권을 독점한 경신환국(1680) 이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노론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대의명분을 중시하고, 민생 안정을 강조하는 정책을 펼쳤지만 소론은 윤증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실리를 중시하고, 적극적인 북방 정책을 주장하는 경향을 보였다. 숙종의 탕평 정치는 불완전했지만, 영조가 즉위하면서 탕평 정치는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사실 탕평이란 서경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정치가 한쪽의 편을 들지 않고 사심이 없으며, 당을 이루지도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영조는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를 펼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
2023.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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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태동기의 정치 - 통치 체제의 변화, 붕당 정치의 전개와 탕평 정치(1)
통치 체제의 변화 붕당 정치가 점차 전개되면서 정치 구조적인 면에서는 비변사의 기능이 확대되고, 3사의 기능이 변하는 등 여러 변화가 나타났다. 16세기 중종 초에 여진족과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임시 회의 기구로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초기의 비변사는 3정승이었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3정승을 비롯하여 전·현직 정승, 공조를 제외한 5조의 판서와 참판, 각 군영의 대장, 대제학, 강화유수 등 국가의 주요 관원들로 확대됐으며, 그 기능도 단순 군사 문제뿐만 아니라 외교, 재정, 사회, 인사 등 대부분의 정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이처럼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자, 의정부와 6조 중심의 행정체계는 유명무실해졌다. 한편 언론을 담당하던 3사의 기능도 변질하였다. 청요직이라고 불리던 과거와는 다르게 3사는 각..
2023.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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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의 문화 - 민족 문화의 융성
민족 문화의 융성 조선 초기에는 민족적인 동시에 실용적인 학문이 발달하여 다른 시기보다 민족 문화가 크게 발달할 수 있었다. 당시의 집권층이었던 관학파는 민생 안정 및 부국강병을 목표로 과학 기술과 실용적인 학문을 중시하였다. 또한, 민족 문화 발달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우리의 문자인 한글 창제를 통해 민족 문화의 기반을 세우고 민족 문화가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 이들 관학파는 15세기의 문화 발전을 주도하였는데, 성리학을 기본적인 지도 이념으로 내세웠지만, 부국강병과 중앙 집권 체제의 강화 그리고 민생 안정에 도움이 되는 다른 학문도 배척하지 않고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로 인해 민족적이면서도 자주적인 성격을 띠는 민족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다. 우리 나라는 오래전부터 일상생..
2023.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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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의 사회 - 사회 정책과 사회 시설, 향촌 사회의 조직과 운영
사회 정책과 사회 시설 조선 시대에는 기본적으로 농본 정책을 펼쳐 농민 안정을 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국가는 양반 지주들이 토지를 지나치게 겸병하는 것을 제한하고, 농민이 토지에서 이탈하여 유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안정적으로 농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왔다. 국가는 각종 재해로 인해 피해를 당한 농민의 조세를 감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혜 정책에도 불구하고 농민의 생활은 자주 곤경에 빠졌다. 국가는 이를 돕기 위해 의장, 상평창 등을 설치하고 환곡제를 통해 피해 농민을 구제하였다. 국가가 아닌 향촌 사회에서 자체적으로 양반 지주들이 향촌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해 사창 제도를 운영하곤 했는데, 이는 향촌의 기반인 농민 생활을 안정시켜 양반 중심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조선 시대의 의료 시설로..
2023.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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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의 사회 - 양반 관료 중심의 사회
양반 관료 중심의 사회 조선 시대는 양천 제도가 법제화된 사회였다. 백성의 신분을 양인과 천민으로 구분하는 제도였는데, 양인은 과거 응시가 가능하고 벼슬을 할 수 있는 자유민이었던 반면에 천민은 비자유민으로서 개인이나 국가에 소속된 채 천역을 담당하였다. 양인에게는 조세, 국역 등의 의무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양천제가 원칙대로만 운영되지는 않았다. 양반은 본래 관직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의 신분으로 고착되었고, 양반 관료들을 옆에서 돕던 중인도 하나의 신분층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하여 양반이라는 지배층과 상민이라는 피지배층 사이의 차별을 부각하는 반상 제도가 보급되었고, 양반, 중인, 상인, 천민의 신분 제도가 점차 뿌리를 내렸다. 조선 시대는 원칙적으로는 엄격한 신분 사회였으..
202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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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의 경제 - 양반과 평민의 경제 활동(2)
양반과 평민의 경제 활동 조선은 유교 국가로서 고려보다도 상업 활동을 강력하게 통제하였다.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종로 거리에 상점가를 조성했고 여기에 개경에 있던 시전 상인을 한양으로 이주시키고 장사를 가능하게 했다. 장사권을 주면서 점포세와 상세를 거두었고 이들 시전 상인은 관상으로, 왕실이나 관청에 물품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면서,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부여받았다. 시전 중 명주, 종이, 모시, 삼베, 어물, 무명의 6가지를 파는 점포들이 가장 번성하였는데, 나중에는 이를 육의전이라고 불렀다. 또 시전 상인들의 불법적 상행위 통제를 위해 경시서라는 관청을 두었다. 15세기 후반에 서울 근교와 지방에서 농업 생산력이 발달하면서 장시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농업을 장려했던 정부는 농민이 농지..
202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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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의 경제 - 양반과 평민의 경제 활동(1)
양반과 평민의 경제활동 양반들은 녹봉, 과전 그리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와 노비 등으로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들은 대부분이 지주였고, 주된 수입원은 토지와 노비에게서 나왔다. 특히, 양반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는 비옥한 땅이 많았던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었고, 그 규모가 커서 농장 형태를 이루었다. 양반은 노비에게 직접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의 경작을 맡겼다. 토지의 규모가 너무 커서 노비의 노동력만으로 경작이 힘든 경우, 그 주변 농민에게 총생산량의 절반을 나누는 병작반수의 형태로 소작시켰다. 양반은 자신 소유의 토지 근처에 집과 창고를 지어 노비를 직접 감독하고 농장을 살피기도 했지만, 대부분 자신의 친족을 그곳에 보내 대신 관리하게 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202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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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의 경제 - 경제 정책
경제 정책 조선은 재정을 확충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농본주의 경제 정책을 표방했다. 농경지 확대를 통해 농업 생산력 증가 시키고 농민의 조세 부담을 절감하여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건국 초기부터 토지 개간을 적극적으로 장려해 양전 사업을 실시한 결과, 고려 말에 50여만 결이었던 경지 면적이 15세기 중반 세조 대에는 160여만 결로 증가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농업 생산력 향상을 위해 새로운 농업 기술과 농기구를 적극적으로 개발하여 민간에 보급하였다. 농업은 적극적으로 장려했지만, 상공업자가 마음대로 영업하는 것은 철저하게 규제하였다. 당시 사대부들은 재화를 국가가 통제하지 않고 자유 경제로 내버려 두면 사치와 낭비가 조장되고, 이로 인해 농업이 피폐해져 빈부 격차가 커질 ..
202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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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의 정치 - 양 난의 극복
양 난의 극복 15세기 일본과의 관계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것에 비해 16세기에는 일본과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일본인의 무역 요구는 거세졌던 것에 반에 조선 정부의 통제는 점차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3포 왜란과 을묘왜변이 중종과 명종 대에 일어났다. 3포를 개항한 이후, 특히 명종 10년에 왜인이 7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전라남도 연안을 습격한 사건을 을묘왜변이라 하는데 이후 일본과의 교류는 일시적으로 단절됐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비변사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하게 했으며 일본에 사신을 보내 정세를 살펴보는 등의 노력을 하였다.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뒤였는데,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를 한 후 20만 대군을 이끌고 1592년..
202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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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의 정치 - 사림의 대두와 붕당정치(2),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사림의 대두와 붕당정치 마침내 선조가 즉위하면서 그동안 향촌 사회에 숨어 세력을 확장해오던 사림 세력이 대거 중앙으로 진출하면서 정치 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 세력은 이전의 척신 정치의 잔재를 어떻게 청산하느냐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게 되었다. 명종 때 이후부터 정권에 참여했던 기성 사림은 척신 정치를 과감하게 개혁하는 것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던 반면에 새롭게 정권에 차명하게 된 신진 사림은 철저하게 원칙을 지켜 척신 정치를 청산해 사림 정치의 실현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두 세력의 갈등은 심화되었고 기성 사림을 중심으로 서인이 형성되었으며 신진 사림을 중심으로 동인이 형성되었다. 이황과 조식, 서경덕의 학문을 이어받은 동인은 다수의 신진 사림 세력이 참여하여 먼저 붕당의 형태를 이루었던 반면..
2023.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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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의 정치 - 통치 체제의 정비(2), 사림의 대두와 붕당 정치(1)
통치 체제의 정비 조선 시대에는 주로 과거나 음서, 천거 등을 통하여 관리를 선발하였다. 과거의 종류로는 문관을 선발하는 문과와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 그리고 기술관을 선발하는 잡과가 있었다. 문과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식년시와 비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증광시, 알성시 등이 있었다. 문과의 식년시 같은 경우엔 각 도의 인구 비례에 따라 합격자를 선발하는 초시, 초시 합격자들 중에서 33명을 선발하는 2차 시험인 복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왕의 주관하에 실시하는 전시를 통해 순위를 결정지었다. 천인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제한 없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지만, 탐관오리의 아들, 재가한 여자의 아들과 손자, 그리고 서얼은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다. 문과(대과)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먼..
2023.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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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의 정치 - 통치 체제의 정비(1)
통치 체제의 정비 조선의 중앙 정치 체제는 성종 때 편찬 완료된 경국대전에 명시되어 법제화되었다. 관리는 양반으로 문반과 무반으로 구성되었고, 30등급(18품 30계)으로 나뉘었다. 조선 시대의 관직은 국정 총괄의 역할을 하는 의정부와 그 아래 국왕의 명을 집행하는 행정 기관인 6조로 구성된 경관직(중앙 관직)과 외관직(지방 관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6조 아래에는 여러 관청이 업무를 나누어 맡아 행정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으며, 의정부와 6조의 고관들이 중요 정책 회의에 참여하거나 또는 국왕과 함께 경연에 참석하여 정책에 대한 논의를 진행함으로써 각 관서 사이의 업무들을 조정하고 통일적으로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으로 불리는 3사는 고려시대와 다르게 관리들의 비리..
2023.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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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의 정치 - 근세 사회의 성립
근세 사회의 성립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 군사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본격적인 개혁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신진 사대부 사이에서는 개혁을 어떻게 진행할 것이냐를 두고 두 갈래의 의견이 대립하였다. 이색, 정몽주처럼 신진 사대부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온건 개혁파는 고려 왕조의 틀은 그대로 두고 그 안에서 점진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는 방안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고려 후기 비리의 핵심 세력이었던 권문세족을 제거하고 그들의 대토지 사유는 정비하되, 왕조 질서는 그대로 두고 전면적인 토지 개혁은 반대하였다. 하지만 정도전 등의 소수 급진 개혁파는 고려 왕조 자체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역성혁명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전면적인 토지 개혁을 통해 권세가에 의한 토지 사유를 축소하려 하였다. 급진 개..
2023.01.25